‘애국교육’ 필수과목 지정 막아
중국화·경제 불평등 불만 쌓여
중국정부 상대로 싸움 부담 커
이번엔 승리 장담할 수 없어 불안
중국화·경제 불평등 불만 쌓여
중국정부 상대로 싸움 부담 커
이번엔 승리 장담할 수 없어 불안
1997년 영국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중국에 ‘귀환’한 뒤 홍콩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잃지 않기 위해 중국 당국과 팽팽한 긴장을 유지해 왔다. 이번 ‘우산혁명’은 그 정점이다.
“중국에서 정부에 맞서는 싸움은 이길 수 없다는 게 상식이지만 홍콩 시민들은 중국 반환 이후 2차례의 승리의 역사가 있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이 1일 전했다. 첫번째 승리는 2003년 ‘홍콩판 국가보안법’에 반대하는 시위다. 당시 홍콩 정부는 중국에 대한 반역은 물론 외국 정치단체의 홍콩 내 정치행위 등을 모두 금지하는 내용의 국가보안법 제정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것이 기본권을 제한하고 정치적 반대세력을 억압할 수 있다고 생각한 시민들은 반대시위에 나섰다. 시위 인파는 한때 50만명에 이르렀고 홍콩 정부는 법안을 철회했다.
두번째 승리는 2012년이다. 당시 홍콩 정부가 친중국적 내용을 강조하는 ‘애국교육’ 과목을 필수 교과목으로 지정하려 하자 ‘정치적 세뇌’라며 고교생들이 반발했다. 고교생들이 주축이 돼 대규모 반대 시위를 벌여 당국의 철회를 끌어냈다. 그때의 고교생들은 이제 대학생이 되어 다시 거리에서 자유롭고 민주적인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홍콩 정부와 중국을 상대로 한 시위에서 거둔 승리의 경험이 이번 ‘우산혁명’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그 뿌리는 반환 이후 진행된 ‘중국화’와 경제 불평등에 대한 불만과 불안이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홍콩 시민 대다수가 중국 공산당 통치를 피해 중국 대륙에서 이주해온 난민이거나 난민의 후손들로, 중국 정부에 대한 불신 정서가 있다고 분석했다. 1997년 영국으로부터 홍콩의 주권을 반환받을 당시 중국은 ‘일국양제’ 원칙 아래 50년간 홍콩의 기존 체제 유지와 자치권 보장을 약속했다. 그러나 중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커지면서 일국양제 원칙이 훼손되고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홍콩인들은 반환 이후 중국인들이 몰려와 집값이 폭등하고, 인구가 늘어 살기가 팍팍해졌다고 불평한다. 중국의 자산가들이 홍콩에 투자하면서 홍콩 주택가격은 4년 새 120% 가까이 올랐다. 홍콩에서 유학하는 중국 학생들은 10년 동안 10배 이상 늘어났고, 졸업 뒤 홍콩에서 취업한 학생도 6400여명으로 3년 동안 2배로 늘어났다. 홍콩 학생 및 학부모들은 중국 학생들이 홍콩 대학을 차지하고 졸업 뒤엔 홍콩인들의 밥그릇을 빼앗고 있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빈부격차도 심화됐다. <알자지라>는 “홍콩에서 부의 불평등은 사하라 사막 이남지역보다 더 심하다”며 “많은 이들은 정부 정책이 일부 기득권층에만 이로운 불균형 정책이라고 비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전에 거둔 승리의 기억으로도 ‘우산혁명’의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다. 앞서 두번의 싸움은 모두 홍콩 정부를 상대로 한 것이었다. 이번 시위는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의 결정을 뒤엎어야 한다. 2012년 시위 당시는 보시라이 사태와 권력교체기의 후유증으로 중국 지도부가 혼란스러웠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현재 시진핑 주석은 반부패 운동의 성과를 바탕으로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하고 있다. 신중국 건국 65주년을 맞아 지난 30일 밤 열린 공식 기념행사에는 장쩌민·후진타오 전 국가주석을 비롯한 중국 전·현직 최고지도자들이 모두 출석해 단결을 과시하려 했다.
세대간 차이도 ‘우산혁명’ 앞날을 불투명하게 한다. 젊은층들은 시위를 강력히 지지하지만 자산을 가진 40대 이상 세대는 시위가 장기화할 경우 경제적 타격을 우려한다. 뚜렷한 지도자가 없다는 것은 강점이자 약점이다. 이번 시위는 대부분 어린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해 진행하고 있어 지도자 체포만으로 진압할 순 없지만 얼마나 장기적으로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박영률 기자 ylpak@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