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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중국

압록강 얼린 추위, ‘단둥 사람들’ 남북화해 염원은 못얼려

등록 2012-01-01 22:13수정 2012-01-01 23:13

북한에 들어갈 물품들을 가득 실은 차량들이 지난 26일 중국 랴오닝성 단둥에서 압록강철교를 건너 신의주로 향하고 있다. 압록강철교는 북한과 중국을 오가는 물자의 80%가 오가는 북-중 교역의 길목이다.   단둥/박종식 기자 <A href="mailto:anaki@hani.co.kr">anaki@hani.co.kr</A>
북한에 들어갈 물품들을 가득 실은 차량들이 지난 26일 중국 랴오닝성 단둥에서 압록강철교를 건너 신의주로 향하고 있다. 압록강철교는 북한과 중국을 오가는 물자의 80%가 오가는 북-중 교역의 길목이다. 단둥/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북-중 ‘접경인’들의 새해맞이
강변엔 공안·국경수비대 득실
시내 들어서면 ‘일상생활’ 시작
이념 넘은 ‘동북아 삶의 용광로’

‘한국 사우나’에 북한인 북적
화교들은 조선족 옷가게에서
한국물건 떼다가 북한서 팔아

“DJ 평양 왔을때 가슴 저려와
긴장악화로 남북 모두 교훈 얻어
좀더 성숙한 관계로 나아가야”

 한반도의 허리를 지나는 철조망은 남과북을 가르지만, 한반도의 어깨를 흐르는 강은 남과 북을 뒤섞는다. 북한 평안도 신의주와 압록강을 경계로 마주앉은 중국 랴오닝성 단둥에선 남과 북에서 온 사람과 북한 출신 화교, 조선족, 한족 들이 끊임없이 부대끼며 살아간다. 압록강이 태초에 사람들의 경계가 아니라 삶의 터전이었음을 웅변하는 듯하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후 격변의 시기에 들어선 한반도를 지켜보는 압록강변 사람들은 2012년 새해 한반도의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압록강은 얼어붙어 있었다. 단둥을 유유히 굽이쳐 흐르던 강줄기는 황금평을 지나면서 유속이 떨어지더니 바다가 가까워지자 얼음 밑으로 숨어버렸다. 지난해 6월 북한과 중국이 경제특구 착공식을 열었던 황금평은 한겨울의 황량함에 쌓여 있다. 눈이 수북이 쌓인 강둑 너머로 웃자란 억새들이 바람에 떨고 있다. 누군가에게서 들은 검은 밤 언 강을 걸어 오가는 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팅처!(차를 멈춰라)”


지난 28일 압록강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변. 하류의 항구도시 둥강(동항)에서 얼어붙은 압록강을 찍고 단둥을 향해 차를 달린 지 채 1분도 안 돼 어디선가 중국 국경수비대 차량이 나타났다. 선임자로 보이는 중년의 병사가 다가와 신원을 확인하더니 “조선 쪽도 우리 쪽을 촬영하지 않듯 우리도 저쪽을 촬영해선 안 된다”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곤 카메라에서 사진을 모두 지우게 하고, 수첩에 차 번호까지 적는다. “다시 적발될 경우에는 엄중히 책임을 묻겠다”는 경고가 매섭다.

압록강변을 취재하는 내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날지 모를 중국 공안이나 국경수비대의 시선을 의식해야 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갑작스런 사망이 몰고온 긴장과 불안감이 압록강에 드리운 그림자다. 문득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 학창시절 3·1운동에 참여했다 몸을 피하려 압록강을 넘던 이미륵(1899~1950)이 생각났다.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에서 묘사한 야밤의 압록강에도 ‘골풀들이 머리 높이까지 자라 있고, 무장군인 순찰대가 사방에 퍼져’ 있었다.

그러나 단둥에 들어서면 압록강은 다시 일상을 되찾는다. 북한과 중국을 오가는 교역물자의 80%가 이곳을 지난다는 중조우의교와 한국전쟁 때 끊긴 압록강단교가 나란히 서 있는 단둥은 남북한과 중국이 버무려진 묘한 도시다. 이곳에선 중국인과 한국인, 북한사람, 조선족, 북한 출신 화교, 탈북자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자연스레 어우러져 산다. 이념은 달라도 내세우는 이는 없다. 새벽녘 압록강의 물안개처럼 이념의 경계가 흐물거린다.

무역상들이 모여 있는 이마루(1가)와 얼마루(2가)는 여전히 생동한다. 북한에 사는 화교들은 조선족 식품점이나 옷가게에서 한국 물건을 떼다 신의주로 들어가 판다. 북한에서 넘어온 그림이나 골동품을 중국인들에게 파는 한국 화랑도 문을 열고 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사우나엔 북한 외화벌이 일꾼들이 단골로 드나들기도 한다.

국경을 넘나드는 왕래에 익숙한 이들에게 남북 화해와 평화는 먼 미래의 숙제가 아니다. 오래전 단둥으로 와 사우나를 열었다는 한 동포는 “손님 중에 가족과 함께 오는 북한 외화벌이 일꾼이 있는데, 그의 어린 딸은 나를 무척 따른다”고 자랑한다. 그는 “그동안의 긴장 악화로 남북 모두 교훈을 얻었으니 이제 좀더 성숙한 남북관계로 나아갈 때”라고 말했다.

성탄절 조선족 교회에서 만난 이들도 비슷한 소망을 품고 있었다. 의사가 돼 세계 여러나라의 어려운 이들을 돕고 싶다는 이예영(14·조선족 중학교 2년)양은 어린 나이에도 깜찍하게 생각이 깊었다. 이양은 “신의주가 개발되고 한국과 조선(북한)의 사이가 좋아지면 국경도시 단둥도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며 “조선이 힘들고 지치면 모두가 도와서 잘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근 단둥에서 대북무역의 중심은 8000∼1만여명에 이르는 북한 출신 화교들이다. 중국을 모국으로, 북한을 고향으로 둔 이들은 단둥에 살면서도 북한을 그리워한다. 중국 국적을 얻으려면 5년 동안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평양에서 태어나 2005년 단둥으로 건너왔다는 한 화교(28)는 “우리의 피는 중국인이지만 식성이나 정서는 조선사람과 비슷하다”며 “2000년 평양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왔을 때 가슴 한구석이 저려오던 감격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여행안내원 일을 하는 그는 돈이 좀 모이면 북한과 무역을 해볼 생각이다.

이미륵은 조국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압록강을 보기 위해 동산에 올랐다. “내 조국과 광활한 만주지방을 가로지르는 이 강의 도도한 흐름을 보았다. 강 이쪽은 모든 것이 크고 칙칙하고 엄숙했다. 저 너머 우리 쪽은 모든 것이 자그마하고 반짝거렸다. 아득히 저 멀리, 고국의 산줄기가 맑은 가을 하늘 아래 첩첩이 쌓여 나타났다. 압록강은 유유히 흘렀다. 어둠이 내려앉았다. 나는 산을 내려와 기차역으로 갔다.”(<압록강은 흐른다> 중에서)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다시 독일로 망명한 그는 생을 마칠 때까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압록강에 밤이 내리면 신의주에선 자그마한 불빛들이 반짝거린다. 신의주역 근처에서 나오는 불빛이다. 그 빛을 향해 단둥에서 출발한 열차가 어둠을 뚫고 압록강을 건넜다.

단둥(랴오닝성)/박영률 기자 ylp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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