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22일 모스크바 크렘린(러시아 대통령궁)에서 러시아를 방문 중인 중국의 ‘외교 사령탑’인 왕이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중앙외사공작위 판공실 주임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모스크바/타스 연합뉴스
중국의 ‘외교 사령탑’인 왕이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회담했다. 푸틴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문을 기다리겠다”며 미국에 맞선 중-러의 연대에 기대감을 드러냈다.
22일(현지시각) 영국 <비비시>(BBC)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전날 모스크바를 방문한 왕이 주임은 이날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과 만난 뒤 크렘린(러시아 대통령궁)으로 이동해 푸틴 대통령과 회담했다. 푸틴 대통령은 국영방송을 통해 중계된 머리발언에서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가 잘 발전하고 있으며 올해 두 나라의 무역 관계가 새로운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이어 ‘어려운’ 현재 외교 상황에 대해 논의하기 바란다면서 “시 주석의 방문을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왕 주임은 “중-러 관계는 다른 나라의 압력에 의해 굴복하지 않는다. 양국 간 전략적 협력을 심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화답했다.
왕 주임이 우크라이나 전쟁 개전 1주년을 앞두고 푸틴 대통령과 회담하며, 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큰 곤경에 빠진 러시아에 힘을 싣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에 따라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시 주석의 방러 역시 현실화될 것으로 보인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전날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시 주석이 4월 또는 5월 초에 모스크바를 방문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5월 초는 러시아의 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일(5월9일)이 있는 기간이다. 신문은 시 주석은 이 만남에서 푸틴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다자 평화회의’ 참가를 촉구하고, 핵무기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지난해 2월4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이 겨울올림픽 개막식이 열리는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반갑게 인사하고 있는 모습. 베이징/타스 연합뉴스
왕이 주임의 러시아 방문은 전날인 21일 이뤄졌다. 왕 주임은 방문 첫날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인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서기와 회담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두 사람이 “현재의 국제 전략 상황을 논의하고, 진정한 다자주의를 공동으로 실천하고, 모든 형태의 일방적 괴롭힘에 반대하며, 국제관계의 민주화와 세계의 다극화를 촉진할 의지를 표명했다”고 간략히 전했다.
러시아 관영 <타스> 통신에 따르면, 파트루셰프 서기는 “우크라이나에서 서방이 촉발한 유혈 사태는 한가지 예에 불과하다. 이 모든 것이 러시아와 중국을 상대로 행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 중국이 ‘핵심 이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대만과 신장·홍콩 문제에 대해 중국의 입장을 지지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중국을 자기편에 묶어두려는 속내를 읽을 수 있다.
지난해 2월 말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뒤 지난 1년간 중-러 관계는 조용하지만 격하게 요동쳤다. 지난해 2월4일 베이징겨울올림픽 개막식 참석에 맞춰 이뤄진 중-러 정상회담에서 두 나라는 “양국의 우정엔 한계가 없고, 협력을 하지 못한 영역이 없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며 중국에 러시아는 무능한 ‘천덕꾸러기’와 같은 존재로 변했다. 시 주석은 지난해 9월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 때 만난 푸틴 대통령에게 “중국은 대국으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 러시아와 계속 협력해갈 것”이라고 냉랭히 반응하는 데 그쳤다. 그러는 한편 전쟁으로 판로를 잃은 러시아산 원유·천연가스를 싼값에 사들이며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지난해 중-러 간 교역액은 사상 최대인 1903억달러(약 250조원)를 기록했다.
이날 회담으로 중국은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다시 대러 관계를 강화하는 쪽으로 ‘외교 방향타’를 틀었음을 분명히 했다. 이달 초 뜻하지 않게 ‘기구 갈등’을 겪은 미국과는 관계 개선이 쉽지 않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미국 <시엔엔>(CNN)은 21일 중·러 두 나라와 ‘두개의 전선’에서 대치 중인 미국 외교를 분석하는 기사에서 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돼 미국이 아시아에 쏟을 수 있는 자원이 줄어들기를 바라고 있는 듯하다’고 분석했다.
조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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