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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아시아·태평양

‘군부 손잡은 왕정’ 개혁…담대한 도전 나선 타이 청년들

등록 2020-11-18 18:11수정 2020-11-18 18:45

박은홍 성공회대 정치학과 교수 기고
타이(태국) 의회는 현행 헌법 개정안을 놓고 17일부터 토론을 시작했다. 군부가 실질적인 정부 구성 권한을 쥐게 한 272조가 개정 대상이다. 시민단체 아이로(iLaw)는 ‘군부가 일부 상원의원을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을 폐지하고 ‘국민이 모든 상원의원을 직접 선출하자’는 내용을 뼈대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했다. 이 안은 다른 6개 개헌안과 함께 논의되고 있다. 방콕 의회 주변에는 철조망이 설치됐고 시위대는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이에 반발해 보수적인 왕실 지지파도 시위를 벌였다. 17일 양 시위대 충돌과 경찰 시위 진압 과정에서 50명 이상이 다쳤다. 특히, 민주화 요구 시위대 다수를 점하는 청년들은 타이 사회 대표적인 금기였던 ‘군주제 개혁’ 논의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박은홍 성공회대 정치학과 교수가 타이 젊은이들의 대담한 도전에 대한 글을 보냈다.
17일 타이 수도 방콕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가 오리 모양 튜브 뒤에서 경찰이 쏜 물대포를 피하고 있다. 방콕/로이터 연합뉴스
17일 타이 수도 방콕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가 오리 모양 튜브 뒤에서 경찰이 쏜 물대포를 피하고 있다. 방콕/로이터 연합뉴스

타이 청년들이 최고 15년형을 받을 수 있는 국왕모독죄의 위협을 감수하고 거리에 나선 지 수개월이 지났다. 이들은 코로나가 확산되기 직전인 지난 2월 그들이 지지했던 신미래당이 군부에 동조하는 보수적 사법부에 의해 강제 해산된 것에 대해 격렬히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다. 코로나 상황이 진정되면서 이들의 대담한 도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지난 8월 타이 청년들은 1976년 이른바 ‘혹 뚤라’(10월 6일이란 의미) 이래 처음으로 왕실 개혁을 언급하는 선언문을 공개했다. 이들의 정치선언은 삽시간에 국내외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이 타이에서는 국왕과 왕실에 대한 비난성 언급은 금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타이에서 왕실이 신비화된 지는 오래다. 1932년 입헌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타이 국왕은 불교와 국가를 상징했다. 국왕에 대한 불충은 반역 행위이자 배교행위로 간주되었다. 라마 6세인 왓치라웃 국왕은 서구 민주주의 도입을 고려해보라는 선친인 쭐라롱껀대왕의 유지와는 정반대로 절대군주제를 옹호하면서 국왕을 인간의 몸을 지배하는 뇌에 비유하였다. 일종의 뇌수론을 설파한 것이다. 그가 서구민주주의 도입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 서구의 정치제도를 받아들일 만큼 타이 국민대중의 의식 수준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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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신비화와 군의 절대적 후원

그러나 그의 시기에 과도한 국가재정 지출로 국민경제는 휘청거리기 시작했고, 엘리트 계층 내부에서부터 왕실에 대한 불만이 일기 시작했다. 여기에다가 세계 대공황까지 덮쳤다. 마침내 1932년 6월24일 일단의 문민-군부 엘리트들이 절대왕정을 종식시키는 입헌혁명을 일으켰다. 이로써 국왕은 법의 지배하에 놓였다. 혁명의 주역은 카나라싸던(인민당)이었다. 특히 이 혁명가 집단에서 두뇌 역할을 하였던 쁘리디 파놈용은 타이를 유럽 수준의 사회민주주의 국가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쁘리디의 개혁노선은 1940년대 중-후반 군부-왕당파 동맹에 의해 좌초되었다. 쁘리디는 망명을 떠나야 했고 입헌혁명의 동지였던 군부 엘리트들이 왕당파와 손을 잡자 왕실은 서서히 기존의 위엄을 회복했다. 이 당시 창당된 민주당은 왕당파의 아성이 되었다.

70년동안 국왕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라마 9세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2016년 사망)은 그의 카리스마를 통해 과거 짜끄리 왕조의 융성기라고 할 수 있는 쭐라롱껀대왕 시기 못지않을 만큼 타이 왕실의 권위를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는 전통적으로 불교의 법도에 따라 통치하는 성군을 가리키는 ‘탐마라차’로 칭송되었다.

이러한 푸미폰 국왕의 신비화 과정에는 군의 절대적인 후원이 있었다. 1950년대 후반-60년대 초반에 타이식 민주주의를 내걸었던 싸릿 타나랏 총리와 1980년대 푸미폰 국왕에게 대왕 칭호를 헌사한 쁘렘 띤술라논 총리가 그의 은인들이다. 여기에다가 보수적인 학계 인사와 언론, 그리고 정치지도자들이 푸미폰 국왕의 신비화를 적극 도왔다.

주목할 것은 국왕과 왕실의 성역화가 가혹한 처벌을 가할 수 있는 국왕모독죄와 함께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1976년 10월 국왕이 1973년 학생들 주도의 반군부독재 시위로 망명길에 올랐던 군 출신 총리와 비밀리에 회동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왕실 비판 여론이 시작됐다. 이때 학생들이 집회를 열고 있던 명문 탐마삿대학을 공권력과 정체불명의 폭도들이 급습하였다. 이 유혈사태로 많은 학생이 죽고 정글로 피신하였다. ‘혹 뚤라’로 일컬어지는 이 유혈사태 이후 국왕모독죄 처벌 수위도 강화되었다.

지난달 16일 타이 수도 방콕에서 한 남성이 경찰 방패를 손으로 밀고 있다. 방콕/로이터 연합뉴스
지난달 16일 타이 수도 방콕에서 한 남성이 경찰 방패를 손으로 밀고 있다. 방콕/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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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셔츠와 옐로셔츠 대결에 청년층은 냉담

자발적 혹은 강압적 복종을 기반으로 형성된 푸미폰의 절대적 카리스마에 도전한 정치인이 바로 2006년 9월 19일 군사 쿠데타에 의해 쫓겨난 탁신 친나왓 총리이다. 통신 재벌 출신인 그는 과거 ‘운동권’ 출신들을 영입하면서 혁신적인 정치마케팅을 통해 국왕의 카리스마에 도전할 만큼 대중성을 확보하였다. 국왕의 지지기반이던 농촌에서 영웅은 탁신으로 바뀌었다. 1997년 경제위기도 이른바 탁시노믹스에 의해 극복되었다. 그는 20년 집권을 공언했다.

그러나 그의 절대적 인기는 그의 부패 행각이 드러나면서 위기를 맞았다. 특히 청년들이 등을 돌렸다. 그런데도 타이 북부와 동북부 지역과 빈곤지역에서 그의 인기는 확고부동했다. 그동안 탁신만큼 정책적으로 저소득 농촌 지역을 지원한 정치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수층에서는 이런 그를 포퓰리스트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방콕 중산층들은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탁신이 생색을 내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일부 방콕인들은 탁신에게 표를 던지는 농촌 지역 주민들이야말로 유권자로서의 기본이 없다고 비아냥거렸다.

탁신에 대한 비난은 언론 분야 시민사회로부터도 나왔다. 그가 노골적으로 언론 통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침내 2006년 초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보수 성향의 방콕 중산층들과 함께 거리로 쏟아져 나와 탁신 퇴진을 외쳤다. 그러나 탁신은 요지부동의 그의 지지기반을 믿고 총선으로 대응했고 예상대로 승자는 역시 탁신이었다. 그러자 반탁신 진영은 이에 불복하고 또다시 거리의 정치를 시도했다. 정국은 다시 혼돈으로 치달았다. 이 시점에 질서회복과 국왕 수호를 내건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국왕은 이를 승인했고, 반탁신 진영은 탁신의 오만과 그를 지지하는 다수의 횡포가 극치에 이른 시점에서 일어난 군의 시의적절한 개입으로 받아들였다. 이들에게는 ‘좋은 쿠데타’였다.

이때를 계기로 타이사회는 ‘쿠데타 반대’를 외치는 친탁신과 ‘탁신 퇴출’을 외치는 반탁신으로 분열하였다. 전자는 레드셔츠를, 후자는 옐로셔츠를 각각 입고 거리에 나왔다. 타이사회는 색깔의 정치현장이 되었다. 이 양극단의 대결 속에서 대다수 청년은 냉담했다.

2010년 5월 방콕 시내는 선거실시를 요구하는 레드셔츠에 대한 왕당파 민주당 정권의 유혈진압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친탁신 세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청년들이 레드셔츠에 대한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 2010년 5월 사태 이후 국왕모독죄 위반사례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때 국왕모독죄에 해당하는 형법 112조 철폐운동을 하던 노동운동가 솜욧 푸룩사카셈숙이 체포되었다.

마침내 이듬해 총선이 실시되고 또다시 친탁신 세력이 선거에 이기면서 탁신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이 총리직에 올랐다. 2014년 5월 22일 현 수상인 쁘라윳 짠오차가 주도한 군부 쿠데타로 잉락 정권이 붕괴되기 전까지 타이사회는 옐로셔츠와 레드셔츠의 치열한 대립의 연속이었다. 레드셔츠의 지지를 받는 잉락 총리이었지만 실질적인 군 통수권자가 되지 못했다. 군이 왕실기구인 추밀원의 수장이자 군 장성 출신 쁘렘 전총리의 영향력 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잉락을 위시한 친탁신 집권세력이 탁신의 사면을 시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2013년 하반기부터 왕당파가 이끄는 반탁신 집회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시위대의 선두에 민주당 출신 수텝 트억수반 전 부총리가 섰다. 이들은 사실상 군의 정치개입을 선동하였다. 마침내 쁘라윳 짠오차 당시 육군참모총장이 이끄는 군부가 쿠데타로 화답했다. 헌정은 다시 중단되었다. 쁘라윳은 쿠데타 기구인 국가평화 질서회의(NCPO) 의장에 올랐다. 푸미폰은 2006년에 이어 다시 이 쿠데타를 승인했다. 이를 바라본 청년들은 크게 실망했다. 국왕모독죄와 컴퓨터범죄법에 해당하는 사례가 이어졌다.

17일(현지시각) 타이 방콕에서 민주화 요구 시위대가 총상를 입고 쓰러진 시위 참가자를 병원으로 옮기는 것을 돕고 있다. 시위 참가자 중 총상을 입은 이도 몇명 있는데, 경찰은 실탄이나 고무탄을 발사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방콕/AP 연합뉴스
17일(현지시각) 타이 방콕에서 민주화 요구 시위대가 총상를 입고 쓰러진 시위 참가자를 병원으로 옮기는 것을 돕고 있다. 시위 참가자 중 총상을 입은 이도 몇명 있는데, 경찰은 실탄이나 고무탄을 발사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방콕/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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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 입헌혁명 정신을 소환

타이 청년들이 불만이 더욱 고조된 것은 2016년에 군부 주도로 극히 형식적인 국민투표를 거쳐 신헌법을 통과시켰을 때이다. 신헌법은 상원의원 임명권을 사실상 쿠데타 주역들이 갖도록 하고 이들이 총리 선출에 참여해 총선이 있더라도 군부가 원하는 정권이 들어서도록 하였다. 2019년 3월 총선에서 친군부 정당이 내세운 쿠데타 주역 쁘라윳 짠오차가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군부의 기득권을 보장해준 2017년 헌법 덕택이었다.

그런데다가 쁘라윳 정권은 올해 초 사법부를 동원하여 지난해 3월 총선에서 군부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면서도 친탁신 정당과 차별화하여 청년들의 대폭적인 지지를 받아 제3정당이 된 신미래당을 해산시켰다. 또 청년들의 영웅이었던 타나톤 쯩룽르엉낏을 비롯한 주요 당 지도부 인사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군부의 노골적인 응징이었다.

여기에다가 공교롭게도 군부와 각별한 동맹관계에 있는 라마 10세 와치라롱껀 국왕의 기행이 이어졌다. 이러한 자발적 탈신비화 행동으로 새로운 국왕은 청년들에게 불편하고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2016년 12월 국왕에 즉위한 이래 선친의 ‘탐마라차’ 이미지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라마 10세에 대해 ‘푸미폰주의자들’로서도 난감하게 되었다.

마침내 타이 청년들은 군정 종식, 개헌 및 총선 재실시와 함께 추밀원 폐지 등 왕실 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들은 국가는 국왕의 것이 아니라 인민의 것임을 선언한 1932년 카나랏싸던(인민당)의 입헌혁명 정신을 소환하였다.

‘해방청년’을 자임한 타이 청년들은 1932년 입헌혁명이 미완의 혁명이었음을 인지하고 있다. 여전히 전근대적 봉건적 요소가 타이사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다.

기고 | 박은홍 성공회대 교수. (한겨레 자료 사진)
기고 | 박은홍 성공회대 교수. (한겨레 자료 사진)

나아가 타이 청년들은 1932년 혁명의 한계가 대중적 기반이 취약한 ‘위로부터의 혁명’에 있었음을 알고 1932년 혁명가 집단 ‘카나라싸던’에서 ‘카나’(일단의 무리라는 의미)를 떼어내고 지도부와 대중이 따로 없는 ‘랏싸던’(인민)을 자처하고 있다. “우리가 인민이다!” 이것이 현재 타이에서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는 청년주도 해방운동의 정체성이다.

타이사회를 깊이 들여다본 한 외부 학자는 타이의 존왕주의를 ‘요상한 골동품’(curiously antique)에 비유하였다. 그동안 이 ‘요상한 골동품’은 입헌군주제임에도 절대군주제처럼 타이사회에 넘어서는 안 되는 정치적 경계를 설정했다. 그런데 이 경계를 멍에로 느낀 타이 청년들이 희생을 각오하고 이 경계를 허무는 행동에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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