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공원에서 14일(현지시각)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던 대통령을 국가영웅묘지로 이장하려는 데 반대하는 시민들이 우산으로 ‘마르코스는 영웅이 아니다’라는 문구를 만들어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마닐라/AFP 연합뉴스
필리핀 시민들이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1917~1989) 전 대통령을 국가영웅묘지에 안장하려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계획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14일(현지시각)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는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에도 2000여명의 시민이 도심의 리잘 공원에 모여 마르코스의 영웅묘지 이장 계획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고 <마닐라 타임스> 등 현지 언론이 전했다. 이날 시위는 마르코스 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을 벌이다 살해·실종됐거나 고문받고 투옥됐던 피해 당사자와 유가족, 인권운동가와 야당 정치인들이 꾸린 ‘마르코스 이장 반대 연맹’이 주도했으며 일반 시민들도 대거 참여했다. 두테르테의 계획 철회를 압박하는 서명운동도 벌어졌다.
중도우파 야당인 자유당의 레일라 드 리마 상원의원은 “마르코스의 영웅묘지 안장은 폭군이 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의미”라며 “이 나라에서 누구에게도 폭군이나 독재자가 될 여지를 주지 말자”고 호소했다. 중도좌파 성향인 아크바야시민행동당의 리사 혼티베로스 상원의원도 <아에프페>(AFP) 통신에 “마르코스는 우리나라 영웅들에 대한 전례 없는 적이었다”며 “(그를 영웅묘지에 이장하면) 우린 온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위에 참가한 한 시민은 “젊었을 때 (마르코스 정권에 의해) 투옥됐었다. 마르코스가 영웅묘지에 묻힌다는 건 상상하기도 힘들다”며 눈물을 훔쳤다.
마르코스는 1965년 선거로 집권해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한 이래, 철권통치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억압하고 부패를 일삼은 인물이다. 그의 재임 시기 필리핀에선 수천명이 실종 또는 살해됐으며, 7만5000여명이 투옥·고문 등 정치적 박해를 받았다. 마르코스 가족은 1986년 전국적인 반독재 시위인 ‘피플 파워’로 권좌에서 쫓겨나 하와이로 도망간 지 3년만에 죽었다. 그의 가족은 유해를 필리핀의 고향으로 옮겨온 뒤 마르코스 박물관을 지어 유리관에 전시하고 있으며, 이후 줄곧 영웅묘지 이장을 요구해왔다.
지난 6월말 취임한 두테르테 대통령은 마르코스가 전직 대통령이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항일투쟁 영웅으로 국가영웅묘지 안장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자신의 아버지 빈센트가 마르코스 정권 시절 총무수석으로 입각해 일한 개인적 인연까지 거론하며 마르코스의 이장을 두둔하고 있다. 필리핀 대통령실 수석 공보관 마틴 안다나르는 “두테르테 대통령이 마르코스의 이장에 반대하는 의견을 존중하지만 대통령의 입장은 확고하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안장 규정은 명백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필리핀대의 리카르도 호세 교수는 마르코스가 전쟁무공훈장을 받기 위해 자신의 항일투쟁 경력을 위조했다고 반박했다. 그는 <아에프페> 통신에 “영웅묘지에는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제2차 세계대전 영웅들이 잠들어 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려는 사람이 있다”며 두테르테와 마르코스 일가를 에둘러 비판했다.
<마닐라 타임스>는 오는 9월18일로 예정된 마르코스 이장 예정일을 앞두고 반대 시위가 앞으로도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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