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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아시아·태평양

모스크바의 ‘체스 살인마’ 법정에

등록 2007-08-14 19:02수정 2007-08-14 21:14

60여명 연쇄살인…체스판 칸마다 범행기록 촘촘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종종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러면 숲으로 간다.”

숲이 우거진 모스크바의 대표적인 국립공원 비체프스키 공원. 근처 수퍼마켓 점원인 알렉산더 피추시킨(33)은 ‘비차’라는 애칭으로도 유명한 이곳에 머물고 있는 노숙인들이나 산책나온 노인들에게 접근했다. 그는 상냥한 인사를 건네며 “시간되면 술이나 한 잔 하자”고 권했다.

술 약속이 성사되면 자신이 키우던 개의 무덤가에서 노인과 보드카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노인이 술에 취하면 피추시킨은 같이 마시던 보드카병이나, 망치·쇠파이프 등 둔기로 노인의 뒷머리를 세차게 내려쳤다. 으깨진 두개골 사이로 둔기를 꽂아놓기도 했다.

주검은 쉽게 보일만한 곳에 아무렇게나 버렸다. 예전엔 하수구 등 들키지 않을 만한 곳에 버렸다. 그러나 경찰들이 찾지 못하는 것을 보고 얼마 전부터는 ‘찾기 쉬운’ 곳에 놔두기 시작했다. 지난해 경찰이 엉뚱한 사람을 붙잡아 피의자 검거에 성공했다고 주장하자, 피추시킨은 1주일새 두 사람을 더 죽여 자신의 ‘건재’를 입증했다.

18살이었던 1992년의 학교 친구 살해를 제외하고, 2001~06년 모두 48건의 살인과 3건의 살인미수를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 주검이 발견된 것이 14건, 나머지는 흉기나 실종신고 등을 토대로 확인했다. 그 외 피추시킨은 10건이 더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경찰은 증거를 찾지 못했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남성 노인들이었으며 여성 3명과 어린이 1명도 포함됐다.

피추시킨은 62번에 걸친 자신의 범행 날짜를 제법 꼼꼼히 기록했다. 그의 방에서 발견된 노트에는 가로·세로 8칸의 ‘체스판’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칸칸이 범행날짜를 기록하며 64명 연쇄살인의 ‘기록’을 세우려 했으나, 2칸을 남긴 상황에서 붙잡혔다. 마지막 피해자는 동료점원 마리나 모스칼레바(36)였다. 경찰은 모스칼레바가 남긴 메모와 근처 지하도 감시카메라 촬영 화면을 토대로 사건 발생 13일, 주검 발견 이틀만에 지난해 6월16일 그를 체포하는 데 끝내 성공했다. 체포 당시 살인 동기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상황이 그렇게 됐다”고만 말했다.

일간 <모스크바타임스> 등 등 러시아 언론들은 ‘비차의 미치광이’로 불리는 연쇄살인범 피추시킨의 재판이 한달 뒤부터 공개배심재판 형태로 진행될 예정이라고 14일 보도했다. 러시아에선 사형이 폐지되지는 않았지만, 1996년 이래 판결·집행이 모두 정지돼, 피추시킨은 종신형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피해자 유족들은 처벌이 가볍다는 불만을 보이고 있다. 5년 전 피추시킨의 쇠파이프에 남편을 잃은 타마라 클리모바는 “군중들에게 던져줘서 찢어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4년전 형을 잃은 알렉산더 표도로프는 “피추시킨이 형에게 술을 먹인 뒤, 산채로 우물에 던졌다”며 “총살형도 시원찮다”고 말했다.

범행 사실을 모두 시인한 그는 전국에 생중계된 ‘자백’에서 “내게 살인이 없는 삶은, 여러분에게 먹을 것이 없는 삶과 같다”며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 만큼, 나는 이들(피해자들)의 아버지란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정신과 검사에서 피추시킨은 정상 판정을 받았으나, 그의 변호인은 정신 이상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

수사 과정에서 그는 “소련 시절 연쇄살인범 안드레이 치카틸로의 ‘기록’을 갱신하고 싶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교사 출신인 치카틸로는 1978~90년 우크라이나의 로스토프에서 52명의 어린이·여성 등을 죽이고, 일부 주검을 먹어치우기까지 했다. ‘로스토프의 백정’이라고도 불리는 치카틸로는 사형 판결을 받아 94년 2월14일 처형됐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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