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푸르 시내에 있는 암베드카르 추모 사원과, 그 앞의 암베드카르 초상 입간판.
불가촉천민의 영웅 암베드카르는 살아 있다
인도 지도를 놓고 한가운데에 점을 찍으면 나그푸르다.
‘오렌지 도시’로 알려진 나그푸르는 1702년에 건설돼 300년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외국인들에게 유명한 관광지는 결코 아니다. 뭄바이가 있는 마하라슈트라주의 2대 도시이지만 낡은 시골 도시의 분위기를 안고 있다. 나그푸르를 방문한 때는 4월이었지만, 벌써 45℃에 육박하는 끈적끈적한 공기가 우리를 맞았다.
나그푸르로 간다고 말할 때마다 “도대체 거기 왜 가느냐”는 질문이 날아오곤 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였다.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Bhimrao Ramji Ambedkar 1891~1956), 흔히 ‘불가촉천민’으로 알려진 달리트들에겐 영웅이자 거의 신적 존재지만, 많은 힌두교도들에겐 껄끄러운 인물이다.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받는 달리트 출신 암베드카르는 인도 초대 법무장관으로 인도 헌법을 기초했다.
이미 일주일이 넘은 인도 여행에 지치고 구겨진 채 나그푸르의 ‘딕샤 부미’에 도착했다. 이곳은 1956년 10월14일, 암베드카르가 약 50만명을 이끌고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로 개종한 곳이다. 매년 이 때가 되면 전국에서 수만명의 달리트들이 이곳으로 몰려와 암베드카르를 추모하고 즉석에서 불교로 개종한다. 암베드카르의 개종은 힌두교 안에 뿌리박힌 달리트에 대한 잔인한 차별을 철폐하려는 저항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안에선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경비원 아저씨의 엄숙한 선언으로 나 홀로 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다. 둥근 불탑 모양의 기념관 안은 텅비어 있고 한가운데 불상과 사진, 부다의 생애를 새긴 조각들만이 쓸쓸하다. 매년 10월이면 전국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가득하겠지만 보통은 이렇게 고즈넉한 듯 싶었다. 갑자기 안내원 아저씨가 나를 보고 앉으라고 손짓한다. 외국인이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 기특했던 듯 싶다. 암베드카르에 대해 아냐며, 그가 달리트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인물인지 한참 설명이 이어진다.
밖으로 나와보니 떠들썩하다. 사진기자 임종진과 가이드 박효택 선생님이 사진을 찍자 마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사진을 찍어달라, 어디서 왔냐, 이름이 뭐냐, 우리집에 가자며 팔을 잡아 끄는 사람들까지. 그 떠들썩한 사람들 사이로 흰 옷을 입은 한 젊은 여성이 조용히 마당을 쓴다. 박 선생은 “흰옷은 과부들이 입는 옷”이라고 귀뜸했다. 힌두교에서 과부는 남편을 죽게 만든 여자라고 해서 죄인 취급을 받고 재혼하지 못하며 부모로부터도 버림 받고 쫓겨나 산다고 한다. 기껏 스무살을 갓 넘긴 듯한 이 분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왜 암베드카르 기념관에 와서 이리 조용히 청소를 하고 있을까?
암베드카르는 ‘천민’에 대한 인도 사회의 철저한 멸시 속에서도 달리트 출신으론 최초로 대학 교육을 받고, 정부 장학금을 받아 미국과 영국, 독일에서 경제학과 법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글을 깨친 군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아이들을 천민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교육에 온힘을 쏟았다고 한다.
암베드카르는 봄베이(현재의 뭄바이)로 돌아와 법률가와 대학교수가 됐지만, 그의 동료 교수들은 ‘천민’이 마신 더러운 물에 오염될까봐 암베드카르가 교수 휴게실의 물도 마시지 못하게 했다. 암베드카르는 절벽과도 같은 천민차별에 도전하는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드디어 1927년 천민들이 저수지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상위 카스트들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천민 1만여명과 함께 그는 ‘금지된 저수지’로 가 그 물을 공개적으로 떠 마시고, 카스트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힌두법전을 불태웠다. 그는 또 인도 독립운동과정에서 달리트들에게 독립적인 선거구와 독자적 대표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에 반대하는 상위 카스트 출신 간디와 날카롭게 대립했다. 1947년 인도 독립 뒤 법무장관이 된 그는 헌법을 기초하면서 상위 카스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가촉천민’ 차별을 공식 철폐하고, 대학입학과 공직 임용에 ‘천민’들에게 일정 쿼터를 주도록 헌법에 명시했다. 그는 ‘천민’들은 차별과 가난 때문에 교육 받을 권리를 빼앗겨 왔기 때문에 일정한 몫을 주어야 평등이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인도에선 공식적으로 불가촉천민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 지정카스트(Scheduled Caste)가 공식용어다. ‘억압받는 자’란 뜻의 달리트는 자신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부르는 말이다. 그러나 뿌리깊은 차별이 바뀌지 않는 것을 보면서, 암베드카르는 힌두교 내에서는 차별 철폐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굳혔다. 나그푸르에서의 집단개종은 힌두사회에 대한 그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그는 불교를 신봉하겠다는 맹세와 함께 “나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믿는다”고 선언했다. 그후 몇달 동안 300만명의 달리트들이 그를 따라 불교로 개종했다. 암베드카르는 개종한 지 몇주 뒤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는 달리트들의 영웅이자, 인도 ‘신불교’를 일으킨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많은 힌두교도들에게 그는 불편하고 껄끄러운 존재다. 1994년에는 뭄바이에 있는 그의 동상이 훼손되는 바람에 천민들이 폭동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힌두교는 ‘업 앞에 평등한’ 종교” 오늘날에도 카스트는 인도인들의 삶을 규정한다. 인도철학 연구자인 동국대 이거룡 교수는 “힌두교는 ‘업 앞에 평등한’ 종교다. 카스트는 힌두교의 근간이고, 카스트가 사라진다는 것은 힌두교가 흔들린다는 것이기 때문에 사라지기 힘들다”고 설명한다. 달리트든 브라만이든 업을 통해 그 카스트로 태어났으며, 이번 세상에서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 더 나은 카스트로 태어날 수 있을 뿐 현실에서 그것이 흔들리는 것은 업 사상 자체가 부정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암베드카르는 정치적 도구로 불교를 선택했으며, 신불교는 애초 불교와 비교해 윤회사상을 중시하지 않는 등 유물론적 요소가 강하다. 종교의 영성보다는 정치적 의미가 더 강했기 때문에 결국 한계를 드러냈으며, 불교에서도 불편해 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암베드카르가 인도 사회에 처음으로 개혁 가능성을 보여준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물론 업보다 강한 것이 있으니 돈이다. 돈과 사회적 지위가 날로 중요해지는 인도의 도시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카스트의 힘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돈이 곧 카스트’라는 생각은 도시에서는 현실과도 일부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카스트는 여전히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카스트 제조 자체가 애초 순수 혈통을 보존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수도 델리에서도 카스트를 뛰어넘는 결혼은 죽음으로 끝날 수 있다. 또 농촌으로 가는 순간 그 사람은 카스트의 사슬로 얽매이며, 여전히 달리트들은 마을 밖에 추방돼 살아간다. 인도 인구의 70~75%가 농촌에서 살아간다. 힌두 제일주의를 주장하며 인도 사회의 숨은 힘으로 세력을 확산해온 극우세력 RSS의 본부도 나그푸르에 있다. 아이러니다. 빚 때문에 삶을 포기한 목화 농민들…10년새 3천명 자살
나그푸르를 출발해 또다른 인도를 만나러 갔다. 전날 마신 포도주기가 가시지 않아 꾸벅꾸벅 졸면서 아침부터 차를 달린다. 졸다가 눈을 뜰 때마다 도시에서 멀어지는 게 느껴진다. 신호를 기다리느라 멈춰선 철로변에 서 있는 수레와 짐을 잔뜩 이고 가는 사람들, 덜컹이는 차들, 비몽사몽처럼 농촌으로 향한다.
데칸고원의 흙토지대에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는 비다르바는 수천년 동안 ‘면화지대’로 유명했던 곳이다.
그러나, 97년부터 지금까지 이곳 비다르바에서만 3천명이 넘는 농민들이 빚 때문에 자살했다. 91년 인도 정부의 경제개방 뒤 수입 종자와 면화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토종종자가 멸종되고 농민들은 매년 빚을 내 종자와 농약을 사 농사를 짓지만, 수입면화 때문에 면화값은 해마다 폭락하고 있다. 2~3년 전부터 벌레가 목화 열매를 파먹는 헬리오티스라는 병이 심하게 번지면서 농사는 계속 실패하고 있고, 말라 죽어버린 면화들이 가득한 검은 밭들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비다르바 농민단체에서 일하는 빈드라오의 안내로 우린 여러 마을들을 찾아다녔다. 처음 찾아간 아디와씨 마을에 들어서자 태평소와 거의 똑같은 소리가 울린다. 마을 사람들이 모인 채 결혼식이 한창이다. 불청객이 불쑥 끼어들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내치지 않는다. 방해가 될까 뒤에 어색하게 서 있던 우리를 끌고 결혼행렬의 한 가운데로 데려간다. 한참 동안 인도 결혼식의 일부가 되었다. 결혼잔치에 신이나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우리 팔을 잡아 끄는 동네 개구장이들이 우리 마음을 열어 놓는다.
결혼행렬을 뒤로 하고 찾아간 작은 흙집 앞에 앉아 있던 마흔살 우르꾸라의 얼굴은 얘기하는 내내 아무런 표정이 없다. 그의 남편 더스루 아뜨람(54)은 보름 전 자살했다. 농사를 짓기 위해 돈을 빌렸지만 목화 전염병이 돌아 목화가 다 말라 죽었고 빚을 갚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남편의 빚은 원금 17738루피(37만4천원)에 이자 17160루피를 합쳐 우리돈으로 71만원(33995루피)이지만 22살 아들이 하루 520~620원을 받는 일용노동일조차 일주일에 2번밖에 구하지 못하는 그의 가족에겐 이 빚을 갚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다음 마을인 고사라에 도착하자 이미 해질녁이다. 스물다섯살의 앳된 엄마 라다가 집밖 작은 화로에 뭔가를 끓이며 저녁준비를 하고 있다. 어린 아들 슈반(7)과 반티(4)가 동네 아이들과 한창 놀고 있다. 그들에게 6개월 전 빚 때문에 마을 우물에 빠져 자살한 남편과 아빠에 대해 묻는 나는 내내 너무 잔인하다는 심정으로 비참해졌다. 남편의 밭이 어디냐는 내 질문에 라다와 아이들은 끓고 있는 음식을 놔둔 채 우리를 데리고 이제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밭으로 갔다. 호기심 어린 마을 사람들이 우리를 따라오고, 나중에는 마을 촌장(마을 공동회의 대표)까지 왔다.
자살농민의 가족을 취재하러 마을에 갈 때마다 우리에게 모여들던 호기심 어린 눈빛들, 우리가 떠날 때마다 손을 흔들던 그들을 보면서 동정의 표정을 짓거나 우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이라크와 캄보디아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오랜 고민을 했을 임종진 기자는 그런 가벼운 데서 멈춰서지 말라고 한다. 쉽게 동정하고 마음을 준 듯하면서 결국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우리의 가벼운 행위들은 그 사람들에게 상처만 준다는 것이다.
“연민은 도덕일까 위선일까” 나의 뇌를 때리는 고민
“연민은 항상 도덕적인가” 얼마전 이 글에 번쩍 눈이 뜨였다. “고통의 뿌리에 다가서지 않는 감상적 연민은 현대문명을 지탱하는 빛과 어둠의 이분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연민은 타인의 고통과 상처를 그의 운명이나 무능함으로 환원시키려는 내면의 음모로 쉽게 변질된다. 더구나 연민은 타인이 겪는 고통의 뿌리와 자기 삶의 안락이 깊숙히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연민이 위선적인 경우는 고통 받는 타인의 삶속에 깃든 아름다운 빛을 보지 않고 타인의 고통을 지나치게 과장할 때다. 가난, 질병, 장애보다 그것을 불행이나 비정상으로 보는 시선이 고통과 상처를 더 키운다. 나의 행복은 언제나 타인의 고통에 빚지고 있다. 연민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슬픔에서 멈추지만 연대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실천한다.”(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 <한겨레> 5월24일)
인도 자살농민들을 만났을 때 내내 들었던 생각은 이들과 한국 농촌의 문제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농촌을 희생시키고 착취해서 돌아가는 현재의 경제시스템, 그것을 전세계적으로 강도높게 바꾸고 있는 ‘세계화’와 ‘시장개방’의 물결, 거기서 이익을 보거나 적어도 어쩔 수 없는 추세라고 여기며 ‘공모자’가 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인도나 중국이나 농촌의 가난은 시한폭탄 같은 사회문제다. 91년 시작된 인도의 개혁개방이나 78년 출발한 중국의 개혁개방 모두 도시와 성장중심 노선의 승리를 의미했고, 무자비하게 농민을 휩쓸고 지나갔다. 중국에선 농민들이 최근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키지 전까지 정부나 언론이 문제제기를 억눌러온 데 비해 인도에선 언론이나 교수, 심지어 관리들도 농촌 빈곤문제를 솔직하게 얘기하고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2004년 총선에서 농민과 빈곤층의 반란으로 집권한 인도의 좌파연정 정부는 적어도 농민들을 의식한 정책들을 내놓고 있다. 이것이 인도의 희망일까?
나그푸르, 비다르바(인도 마하라슈트라주) 박민희, 임종진 기자 minggu@hani.co.kr
암베드카르는 봄베이(현재의 뭄바이)로 돌아와 법률가와 대학교수가 됐지만, 그의 동료 교수들은 ‘천민’이 마신 더러운 물에 오염될까봐 암베드카르가 교수 휴게실의 물도 마시지 못하게 했다. 암베드카르는 절벽과도 같은 천민차별에 도전하는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드디어 1927년 천민들이 저수지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상위 카스트들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천민 1만여명과 함께 그는 ‘금지된 저수지’로 가 그 물을 공개적으로 떠 마시고, 카스트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힌두법전을 불태웠다. 그는 또 인도 독립운동과정에서 달리트들에게 독립적인 선거구와 독자적 대표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에 반대하는 상위 카스트 출신 간디와 날카롭게 대립했다. 1947년 인도 독립 뒤 법무장관이 된 그는 헌법을 기초하면서 상위 카스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가촉천민’ 차별을 공식 철폐하고, 대학입학과 공직 임용에 ‘천민’들에게 일정 쿼터를 주도록 헌법에 명시했다. 그는 ‘천민’들은 차별과 가난 때문에 교육 받을 권리를 빼앗겨 왔기 때문에 일정한 몫을 주어야 평등이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인도에선 공식적으로 불가촉천민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 지정카스트(Scheduled Caste)가 공식용어다. ‘억압받는 자’란 뜻의 달리트는 자신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부르는 말이다. 그러나 뿌리깊은 차별이 바뀌지 않는 것을 보면서, 암베드카르는 힌두교 내에서는 차별 철폐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굳혔다. 나그푸르에서의 집단개종은 힌두사회에 대한 그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그는 불교를 신봉하겠다는 맹세와 함께 “나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믿는다”고 선언했다. 그후 몇달 동안 300만명의 달리트들이 그를 따라 불교로 개종했다. 암베드카르는 개종한 지 몇주 뒤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는 달리트들의 영웅이자, 인도 ‘신불교’를 일으킨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많은 힌두교도들에게 그는 불편하고 껄끄러운 존재다. 1994년에는 뭄바이에 있는 그의 동상이 훼손되는 바람에 천민들이 폭동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힌두교는 ‘업 앞에 평등한’ 종교” 오늘날에도 카스트는 인도인들의 삶을 규정한다. 인도철학 연구자인 동국대 이거룡 교수는 “힌두교는 ‘업 앞에 평등한’ 종교다. 카스트는 힌두교의 근간이고, 카스트가 사라진다는 것은 힌두교가 흔들린다는 것이기 때문에 사라지기 힘들다”고 설명한다. 달리트든 브라만이든 업을 통해 그 카스트로 태어났으며, 이번 세상에서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 더 나은 카스트로 태어날 수 있을 뿐 현실에서 그것이 흔들리는 것은 업 사상 자체가 부정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암베드카르는 정치적 도구로 불교를 선택했으며, 신불교는 애초 불교와 비교해 윤회사상을 중시하지 않는 등 유물론적 요소가 강하다. 종교의 영성보다는 정치적 의미가 더 강했기 때문에 결국 한계를 드러냈으며, 불교에서도 불편해 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암베드카르가 인도 사회에 처음으로 개혁 가능성을 보여준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물론 업보다 강한 것이 있으니 돈이다. 돈과 사회적 지위가 날로 중요해지는 인도의 도시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카스트의 힘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돈이 곧 카스트’라는 생각은 도시에서는 현실과도 일부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카스트는 여전히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카스트 제조 자체가 애초 순수 혈통을 보존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수도 델리에서도 카스트를 뛰어넘는 결혼은 죽음으로 끝날 수 있다. 또 농촌으로 가는 순간 그 사람은 카스트의 사슬로 얽매이며, 여전히 달리트들은 마을 밖에 추방돼 살아간다. 인도 인구의 70~75%가 농촌에서 살아간다. 힌두 제일주의를 주장하며 인도 사회의 숨은 힘으로 세력을 확산해온 극우세력 RSS의 본부도 나그푸르에 있다. 아이러니다. 빚 때문에 삶을 포기한 목화 농민들…10년새 3천명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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