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경찰들이 31일 카불 서쪽 가즈니주에서 탈레반에 의해 추가 살해된 심성민씨의 주검을 발견해 수습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 요청 다른 파병이 빚은 참극…한-미 협력 절박
아프간 정부에 영향력 막강…장막 뒤 방관 안돼
아프간 정부에 영향력 막강…장막 뒤 방관 안돼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된 한국인 인질의 추가 살해로 탈레반 납치세력의 의도가 재확인됐다. 탈레반 수감자와 맞교환 없이는 인질 석방이 없다는 것이다. 수감자 석방에는 아프간 정부의 결단이 필요하다. 그 결단에 조지 부시 미국 행정부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사태가 악화하면서 미국 쪽으로 눈길이 쏠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동안 협상 과정의 잘잘못을 떠나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면 미국 정부도 사태를 해결하는 데 더욱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런 인식의 배경에는 미국이 요구한 한국군의 아프간·이라크 파병으로 한국 국민의 위험도가 훨씬 높아졌다는 점이 자리잡고 있다.
곤혹스런 부시 행정부=인질 추가 살해 소식이 전해지기 직전 나온 톰 케이시 미국 국무부 부대변인의 논평은 ‘한국 정부의 노력을 지지한다’는 기존 견해의 되풀이였다. 납치나 테러 세력과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적 견해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에서 빈발하는 자국민과 외국인 납치를 무수히 겪은 미국은 탈레반에 고개를 숙이면 납치 사건이 더욱 확산될 것으로 우려한다. 정부 고위 관계자가 “이번 사태에서 미국이 부각되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은 자국이 나설 일이 아니라며 이번 사태와 거리를 두려 애쓰고 있다. 그렇지만 인질 피해가 늘어가고, 탈레반이 미국을 ‘정조준’한 공세의 강도를 높여 갈수록 곤혹스런 처지로 몰리고 있다.
아프간 정부와 미국=아프간의 하미드 카르자이 정부는 한마디로 부시 행정부의 ‘작품’이다. 아프간 정부의 수립과 유지는 부시 행정부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사실상 내전 상태인 아프간에서 미군은 현재 자체적으로 1만명, 미군 주도의 다국적군에 1만명 정도를 배치해 놓고 있다. 이들 미군이 아프간 정부를 탈레반으로부터 지켜주는 주력 부대다.
또 막대한 규모의 미국 경제지원이 없으면 아프간 정부는 존립할 수 없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 800달러의 아프간은 예산의 90% 이상을 국외 원조에 의존하고 있다. 2001년 탈레반 정권 붕괴 뒤, 140억달러가 넘는 천문학적 돈을 지원한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그런 까닭으로 전문가들은 설령 아프간 정부가 탈레반을 ‘철천지 원수’로 여겨 수감자 석방에 반대한다 하더라도 미국의 의중까지 거스르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진단한다.
국제사회 여론=미국도 국제사회의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 피랍 사태가 날 때마다 다른 나라들이 납치세력에 양보하지 못하도록 제동을 걸어온 미국이 방침을 급선회하기는 쉽지 않다. 납치가 빈발하는 아프간과 이라크의 전쟁은 미국이 주도하는 것이어서 더욱 그렇다. 특히 독일인 피랍자의 억류는 현재진행형이다. 독일인 석방에도 돈과 수감자라는 요구조건이 붙어 있다.
이에 독일 정부는 “협상은 없다”며 강경한 자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한국 피랍자만을 고려해 인질 석방을 묵인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서동만 상지대 교수는 전투병을 보낸 독일과 한국의 사정은 다르다고 지적했다. 독일은 전투병 파병을 결정할 당시 이미 납치 등의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된 반면, 한국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의 지렛대=정부는 미국의 태도에 초점이 쏠리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있다. 미국의 미온적 자세를 지적할 때마다 필요한 협력은 충분히 하고 있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이는 이번 사태에 미국을 끌어들이려 안간힘을 쏟는 탈레반의 의도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한편으론, 부시 행정부를 견인할 지렛대가 별로 없다는 현실도 작용하고 있다. 정부의 유력한 ‘대미 카드’로는 이라크 철군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북핵·안보·무역 등에서 협력이 절실한 미국을 상대로 ‘으름장’을 놓기가 어렵다. 이런 사정을 고려해도 사태가 더욱 악화한다면, 미국과 한-미 관계에 쏠리는 불만의 소리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아프간·이라크 파병 등 미국의 요구는 모두 들어주면서도 경각에 달린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데선 아무런 도움을 얻어내지 못하는 무기력한 정부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분명하다”는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의 31일 발언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박중언 기자 parkje@hani.co.kr
한국 정부의 지렛대=정부는 미국의 태도에 초점이 쏠리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있다. 미국의 미온적 자세를 지적할 때마다 필요한 협력은 충분히 하고 있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이는 이번 사태에 미국을 끌어들이려 안간힘을 쏟는 탈레반의 의도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한편으론, 부시 행정부를 견인할 지렛대가 별로 없다는 현실도 작용하고 있다. 정부의 유력한 ‘대미 카드’로는 이라크 철군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북핵·안보·무역 등에서 협력이 절실한 미국을 상대로 ‘으름장’을 놓기가 어렵다. 이런 사정을 고려해도 사태가 더욱 악화한다면, 미국과 한-미 관계에 쏠리는 불만의 소리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아프간·이라크 파병 등 미국의 요구는 모두 들어주면서도 경각에 달린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데선 아무런 도움을 얻어내지 못하는 무기력한 정부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분명하다”는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의 31일 발언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박중언 기자 park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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