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여성들이 “빵, 일자리, 자유”를 외치며 탈레반 정권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 카불/AFP 연합뉴스
정확히 1년 전인 2021년 8월30일. 아프가니스탄에서 황망히 철수하는 미국의 모습은 전세계에 큰 충격을 남겼다. 미국은 20년 동안 이어진 ‘아프간의 수렁’에서 벗어나 중국과 전략경쟁에 집중할 계획이었지만, 지난 2월 터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두개의 전선’에서 옴짝달싹하기 힘든 위기에 빠졌다. 미군이 떠난 아프간은 평화를 회복했지만, 여성 인권은 벼랑 끝에 몰리고, 인도주의적 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미군의 철군 1년은 무엇을 남겼는지 되돌아봤다.
“그게 아직도 계속되고 있단 말이야?”
냉전 종식으로 사회주의권이 해체되어가던 1991년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중앙정보국(CIA)으로부터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이슬람 성전을 수행하는 무장세력)을 계속 지원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아프간 전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인식했다. 미국은 1980년대 내내 아프간을 점령한 소련을 패퇴시키기 위해 이 지역에 지속 개입했다. 그러던 중 1989년 2월 소련이 철군하자 아프간은 미국에 갑자기 잊힌 땅이 됐다.
대가는 심대했다. 아프간은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의 집결지이자 9·11 테러의 발진 기지가 됐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전 국력을 동원해 아프간을 침공했다. 그리고 20년 동안 탈레반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다 1년 전 전격 철군했다. 2021년 8월30일 밤 11시59분, 마지막 미군 C-17 수송기가 카불 하미드 카르자이 공항을 이륙했다. 미국도 소련처럼 사실상 패퇴하고 이 땅을 떠난 것이다.
그 후 1년 동안 아프간은 다시 ‘잊힌 땅’이 됐다. 그 명암은 도시와 비도시, 남성과 여성, 고학령층과 저학력층 등에 따라 차이가 난다. 도시, 여성, 고학력층, 소수 민족·종파들에겐 그림자가 짙다. 반면, 비도시, 남성, 저학력층, 다수 종족인 파슈툰족·수니파에겐 안정된 삶을 재건하는 기회가 되고 있다.
지난해 8월15일 아슈라프 가니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떠난 카불 대통령궁을 장악한 탈레반 대원들. 카불/AP 연합뉴스
미군 철군과 탈레반의 재집권으로 인한 긍정적 측면은 평화와 치안 확보다. 탈레반을 소탕하려는 미군의 공습과 군벌의 횡포 앞에서 목숨을 위협당했던 상황은 사라졌다. 동남부 잘랄라바드에 사는 모하마드 다우드(32)는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 인터뷰에서 지난 5년간 고향을 방문하지 못했는데 몇달 전부터는 고향의 가족들을 정기적으로 찾는다고 말했다. “전에는 납치의 두려움 때문에 여행이 불가능했는데, 이제 어느 곳이든 여행할 수 있다.”
아프간의 치안 상황을 다룬 유엔 보고서를 보면, 아프간에선 올해 1~5월 치안 사고가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80%나 줄었다. 6월22일 아프간에서 강진이 발생하자, 세계식량계획(WFP)은 하룻밤 새 원조 물품을 전달할 수 있었다. 전쟁 때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남부 비도시 지역에 사는 이들은 전쟁이 끝나 찾아온 평화를 크게 환영하고 있다고 <뉴욕 타임스>는 전했다.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관습에 의해 지배되는 이 지역 주민들은 부패한 정부와 미군의 공습으로 위협받아왔다. 탈레반의 탄생지인 칸다하르주에 사는 모하마드 아시라프 칸(50)은 최근 경제악화로 수입이 70% 넘게 줄었지만, 전쟁이 끝나 얻게 된 자유에 비하면 별문제가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 때 농장에서 아들과 조카가 미군에게 희생되는 것을 지켜본 기억을 갖고 있다. “지금은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 이런 변화는 나에게 하늘과 땅 차이 같은 것이다.”
또다른 변화는 부패의 감소다. 탈레반은 재집권 뒤 상인과 여행자를 상대로 돈을 갈취하던 도로의 경찰 및 군 초소들을 철거했다. 영국 외교부가 지원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이런 초소에서는 한해에 뇌물로 6억5천만달러를 갈취했었다고 <파이낸셜 타임스>는 전했다. 탈레반 정부의 재무부 대변인인 아흐마드 왈리 하크말은 “우리가 부패를 완전히 제거했다고 말하기는 아직 힘드나, 최소화했다”고 자평했다. 유엔은 아프간의 수출액이 2019년 12억달러에서 올해 18억달러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물론 그 대가는 적지 않다. 근본주의적 이슬람주의에 기반한 탈레반 통치에 대한 우려는 상당 부분 현실화됐다. 도시, 고학력층, 여성, 소수 종족·종파가 희생양이다.
지난해 8월30일 밤 11시59분 아프가니스탄 카불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크리스토퍼 도너휴 미국 육군 82공수사단장이 아프간에서 마지막 철수하는 미군으로 C-17 수송기에 오르는 모습. 카불/AFP 연합뉴스
탈레반은 재집권 직후인 지난해 8월17일 여성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여성 교육은 탈레반이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보편적 가치’를 수용하느냐를 가르는 ‘시금석’이었다. 하지만 올해 3월23일 탈레반 정부는 소녀들의 중등학교 등교를 불허하는 종교 칙령을 내렸다. 또 여성이 72㎞ 이상을 외출할 때엔 보호자 남성과의 동반을 요구했다. 음악은 공식적으로 금지됐다. 교사·법조인·공무원·군경으로 근무하던 전문직 여성들은 대부분 실직했다.
그와 더불어 미국이 지난 7월31일 카불에 은거하던 알카에다 지도자 아이만 알자와히리를 제거한 사건은 탈레반의 고립을 깊게 하고 있다. 아프간 정부의 외환보유고 90억달러(약 12조1300억원)에 대한 미국의 동결 조처와 국제원조 중단 등 국제사회의 제재 조처 역시 풀릴 기미가 안 보인다. 특히 전임 아슈라프 가니 정부 아래서 국가 예산의 4분의 3을 차지하던 국제원조가 중단되면서 4천만 아프간 인구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혹독한 식량위기에 놓이게 됐다. 유엔 보고서는 외국 대사관, 군, 비정부기구 등이 제공하던 수백만개 일자리가 사라졌고, 영양실조에 걸린 어린이들이 최근 몇달 동안 카불의 병원에 밀려들고 있다고 전했다.
상황을 보다 못한 57개 이슬람권 국가들이 가입한 ‘이슬람협력기구’(OIC)의 대표단이 지난 6월 카불을 방문해 탈레반 정부에 소녀들의 학교교육 허용 등을 촉구했다. 이들의 출국 뒤 탈레반의 최고지도자 하이바툴라 아훈자다는 7월1일 카불에서 이슬람 학자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왜 이걸 하라, 저걸 하라고 말하는가?”라며 “왜 세계는 우리 일에 간섭하는가?”라고 불쾌감을 드러냈다고 <아에프페>(AFP) 통신이 보도했다. 탈레반 외교부의 압둘 카하르 발히 대변인은 “이슬람 법은 아프간에서 적용되는 것들의 기본”이라고 말했다. 이런 점을 둘러볼 때 탈레반은 앞으로도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가치에 일방적으로 타협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직 어떤 나라도 탈레반이 수립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IEA)을 공식 승인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서방이 아프간을 더 옥죔에 따라 역설적으로 파키스탄과 중국 등 인접국들이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공간이 커지고 있다. 중국·파키스탄·러시아·투르크메니스탄은 탈레반의 외교관을 공식 승인했고, 이란·말레이시아·사우디아라비아도 탈레반 외교관들을 받아들였다.
중국·러시아·이란·파키스탄에는 탈레반보다 이들과 경쟁하는 ‘이슬람국가호라산’(ISKP 혹은 ISIS-K) 등 이슬람국가(IS) 세력이 더 큰 위협이다. 이 대립구도가 이어지는 한 주변국들은 탈레반을 지원할 수밖에 없다. 이 나라들의 또다른 특징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에 거리를 두고 있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미국 대 중·러라는 강대국 간 경쟁이 격화되면 아프간의 전략적 중요성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탈레반을 실질적으로 지원할 역량을 갖춘 유일한 국가인 중국은 아직 신중한 태도를 깨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탈레반이 중국이 원하는 대로 신장위구르 지역과 연결된 이슬람 세력 단속에 적극 협조하고, 희토류 등 자원 개발을 보장하는 조처 등을 취하면 지원이 시작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평가된다. 아프간은 지정학적으로 미국의 패권에 맞서는 중·러의 ‘유라시아 연대’에서 이란과 함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아프간은 이상한 땅이다. 당대 패권국들이 들어와 10~30년씩 전쟁을 벌이다가 황망하게 철수한 뒤 자신들의 전략 지도에서 지워버렸다. 그로 인해 나중에 더 큰 대가를 지불하며 관여해야 했다. 영국·소련·미국이 차례로 그런 우를 범했다. 아프간이 또다시 잊힌 땅이 된다면, 다시 제국들에 막대한 대가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