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1월 19일(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링컨기념관에서 취임 축하 행사로 열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환영 음악회’ 행사장에서 아내 멜라니아와 함께 관객들의 환호에 답했을 때의 모습. 워싱턴/AP 연합뉴스
링컨의 당은 어디로 가나?
남북전쟁에서 미국 연방을 지켜내 세계 최강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고, 냉전 승리도 주도한 미국 공화당은 지금 중대한 갈림길에 서있다. 공화당은 개인의 자유와 작은 정부라는 철학에 바탕한 보수 정당의 원형이다. 공화당이라는 배는 지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몰고온 우파 포퓰리즘인 ‘트럼프주의’라는 허리케인에 휩쓸리고 있다. 공화당의 운명은 세계적으로 거세지는 전체주의 성향의 우파 포퓰리즘 바람 앞에서 각국의 보수 정당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말해주는 중대한 시금석이기도 하다.
공화당, 트럼프주의로 기반 확대되나, 그 포로가 되나?
<워싱턴 포스트>의 12월 여론조사를 보면, 공화당 상·하원 의원 중 27명만이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승리한 지난 11월 대선 결과를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공화당을 찍은 유권자의 40%, 즉 전체 유권자의 21%가 대선 결과가 조작됐다는 트럼프의 주장을 믿는다. 공화당은 트럼프와 그 지지층이라는 튼튼한 기반을 갖췄거나, 아니면 그 포로가 된 상황이다. 지난 대선의 결과는 두 가능성을 모두 보여준다.
우선 공화당이 트럼프주의로 소수인종과 집단에서 득표력이 높아져, 당의 기반과 외연을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부자정당, 백인정당에서 벗어나, 다인종노동계층 대중정당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당이 트럼프주의로 좌표를 잃고, 표류 혹은 와해될 가능성이다. 트럼프주의는 결코 긍정적 이념이나 원칙이 아니고, 소외되고 잊혀진 사람들의 패배와 모멸에 구주류 상류계층들이 영합한 결과일 뿐이라는 진단이 있다. 미국 사회에 축적된 증오와 부정의 결과물인 트럼프주의에 공화당이 포획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공화당이 기껏해야 강퍅한 소수정당으로 퇴행하리라는 우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0월 플로리다주 올랜도 샌퍼드 공항에서 유세를 하면서 청중들에게 비닐봉투에 담긴 마스크를 던지고 있는 모습. 플로리다/로이터 연합뉴스
다인종-중하류층-우파 포퓰리스트들로 구성된 보수 다수 연대 가능성
공화당은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 후보가 패배했으나, 지난 대선에 비해 무려 1100만표 더 득표하며 민주당 조 바이든 당선자에 이어 역대 2번째로 많은 득표를 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공화당이 취약했던 소수 인종·집단에서 득표율을 높였다. 흑인(남 +6%포인트, 여 +5%포인트), 중남미계(남 +4%포인트, 여 +5%포인트), 아시안 등 기타 인종(+7%포인트) 등 소수인종과 민족에서 모두 득표율이 올라갔다. 백인 여성(+3%포인트)에서도 올라갔고, 미국의 주류 다수라 할 수 있는 백인 남성 사이에서만 -1%포인트로 내려갔다. 미국 전체 유권자의 7%인 성소수자 엘지비티(LGBT) 집단에서도 13%포인트가 증가한 27%가 트럼프를 지지했다.
각 주 의회에서 공화당의 지배력은 더 커졌다. 50개 주 중 당파적 우열을 가릴 수 있는 주의회는 48곳인데, 이 중 29곳에서 공화당이 다수당, 19곳에서 민주당이 다수당이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은 텍사스, 펜실베이니아, 미시간, 노스캐롤라이나의 주 상·하원 중 적어도 한 곳에서 다수당이 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공화당은 이들 주의 상·하원 장악을 굳혔다. 이런 추세라면, 공화당이 그동안 맥을 못추던 최대 주인 캘리포니아나 뉴욕의 주 하원 한 곳에서도 다수당이 될 수 있다. 주 의회 장악은 공화당이 줄 곧 해온 유리한 선거구 획정에 필수적이다.
이 모든 것은 트럼프주의가 백인 중하류층에서 입지를 더 공고히 하면서, 소수 인종과 집단까지 외연을 넓힌 덕분이다. 이는 마치 민주당이 1930년대 대공황을 계기로 비도시 내륙 지역의 백인 위주 정당에서 벗어나 대도시 중하류층-남부-비백인-진보가 뭉친 ‘뉴딜연대’로써 거대정당으로 거듭난 것과 유사할 수 있다. 즉, 다인종-중하류층-우파 포퓰리스트들의 확장된 연대라는, 트럼프 이후 ‘보수 다수 연대’ 구축의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 있다. 트럼프가 불질렀던 잊혀진 자들의 패배감과 모멸감을 실질적으로 충족하는 정책과 노선이 나와야 한다. 즉, 트럼프가 줄곧 말하던 ‘워싱턴 하수구를 청소하겠다’, ‘미국의 기업과 일자리를 해외로 내보내는 자유무역 등 국제협정을 파기하겠다’, ‘미국인의 일자리를 뺏는 이민자들을 억제하겠다’, ‘중국에 단호히 맞서겠다’ 등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를 실질적으로 실현할 정책과 노선이 나와야 한다.
공화당이 줄곧 매달려왔던 작은 정부와 개인의 자유 확대라는 리버타리안(개인자유 지상주의) 방향보다는, 경제 문제 등에서 대중의 정서와 이해를 반영하는 ‘포퓰리즘 2.0’ 방향으로 선회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가족기업 및 국내기업에 대한 지원 확장, 전국민건강보험 수용, 독점 규제, 저숙련 노동자 이민의 억제, 중국과의 대결을 강화하면서 중동 등 세계 각지에서의 개입 축소, 엘리트층 진보주의에 맞서는 소수 인종과 중하류층 정치인의 등용 등이라고 <뉴욕 타임스>의 컬럼니스트 로스 두샛은 예시했다.
지난해 12월 미시간주 배틀크리크에서 열린 선거 유세 도중 하원의 탄핵소추안 가결 소식을 전해 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황당하다는 듯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들어 보이고 있는 모습. 워싱턴 배틀크리크/AP 로이터 연합뉴스
공화당, 트럼프없는 트럼프주의를 구현할 수 있나?
공화당에게 가능한 일일까? 그 중에서 가장 공화당의 구미에 맞을 것으로 보이는 저숙련 노동자 이민 억제도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저숙련 노동자 이민은 공화당의 주력 계층인 한계에 처한 가족기업, 국내 중소기업의 비용과 관계되는 문제다. 이 노선과 정책을 채택해 실현한다는 것은 결국 지금의 공화당이 감당할 수 있느냐 여부를 떠나, 트럼프주의에서 트럼프를 빼야 한다는 뜻이다.
작은 정부와 개인 자유를 확대하는 철학에 가장 충실한 보수 싱크탱크 케이토연구소는 다른 차원에서 ‘트럼프 없는 트럼프주의’는 가능하지도 성공할 수도 없다고 설명한다. 케이토연구소는 ‘트럼프 없는 트럼프주의는 공화당의 미래인가?’라는 보고서에서 트럼프주의의 다양한 함의에서 공통분모는 결국 새로운 공화당 ‘노동계급’ 기반과 ‘경제적 민족주의’라고 분석했다. 문제는 트럼프주의에서 필수정책인 경제적 민족주의는 미국 경제나 새로운 공화당 노동계급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각종 여론조사 흐름을 보면 자유무역협정이나 국제무역에 대해 공화당 유권자의 절대 다수가 “좋은 일”이라며 찬성한다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트럼프의 득표력 신장은 기존 공화당 유권자를 묶어둔 상태에서 중하류 노동자 계층을 더한 것이다. 이는 트럼프 정권 하에서 기존 공화당 정책과 노선이 충실히 유지됐다는 것이고, 트럼프의 개인적 언행이 중하류층 노동자를 포섭했다는 의미다.
케이토연구소는 “‘친노동자’ 경제적 민족주의가 대부분의 미국인 유권자(공화당원에서도) 사이에서 그 수요가 갑자기 높아지지 않았다”며 “아마 공화당이 기반을 상실한 도시 교외지역을 탈환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그런 정책들은 공화당의 향후 선거승리에 필수적이라고 믿어져서”, “트럼프의 독특한 능력이 없는 직업 정치인들이 그런 정책으로 그의 승리를 흉내내려다가…작고, 목소리 큰 동질한 소수집단에게만 호소력을 보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결국 “줄어드는 무를 더 짜내서, 더 질기게 만들 것”이라며 공화당이 강퍅한 소수정당으로 추락할 것으로 우려했다.
현대 공화당의 보수주의는 1960년대 배리 골드워터에서 시작된다. 그는 1960년 대선에 출마하라는 보수적인 대학생 단체들의 재촉에 “사람이 중요하지 않다. 여러분들이 옹호하는 원칙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공화당 신보수주의 시대를 연 로널드 레이건은 ‘공화당이 사람들을 결집하는 일련의 원칙을 세우고 유지하지 못하면, 공화당은 죽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골드워터가 시작한 운동으로서의 보수주의, 대공황 이후 공화당의 3연속 집권 등 공화당 시대를 연 레이건의 신보수주의, 아울러 의회에서도 공화당 다수 시대를 연 1990년대 뉴트 깅리치의 ‘미국과의 계약’ 등은 어쨌든 나름대로 보수주의 이념을 구현하려는 원칙들이었다. 이런 노선과 정책 하에서 사회양극화와 불평등이 커졌지만, 공화당은 그 후 별다른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동안 공화당이 그나마 타협했던 자녀에 대한 세금 혜택 및 수당, 생활비 상승에 연계된 최저임금, 연방차원의 사회서비스 확대 등은 공화당의 전통적 거액 기부자들의 격렬한 반대만 자아냈다. 대신에 공화당은 저학력 백인 유권자를 자극하는 선거전술을 구사해왔다.
그 결과, 지난 30년 동안 8차례 대선의 직접 투표(총 득표수)에서 이긴 적은 조지 부시가 재선할 때, 단 한 번뿐이다. 그런데도 공화당이 연방의회나 주 의회에서 우위를 보이고, 연방대법원도 장악했다. 이는 민주당이 우세한 동서부 연안 대도시 지역보다 공화당이 우세한 내륙 비도시 지역에 의석 수가 상대적으로 많이 배정됐기 때문이다.
공화당은 표의 등가성과 대의성이 왜곡된 상황 덕을 보고 있고, 이를 악화시키는 당파적 이득을 계속 추구하고 있다. 가령 공화당은 백인의 인구감소에도 불구하고 그 정치적 지배력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는 다양한 투표 억압 전술을 구사한다. 백인 기독교도가 역차별을 받는다고 선동하는 우익 대안언론들의 활약도 무시할 수 없다. 트럼프의 등장은 이런 요인들의 효과를 확장하며, 공화당에 ‘착시효과’를 주고 있다는 분석이다.
지난달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와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 지지자가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의 개표소 앞에서 시위 도중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모습. 디트로이트/AP 연합뉴스
트럼프주의 극복은 공화당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과제
공화당은 2012년 대선에서 밋 롬니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 패배한 뒤, 당노선을 점검하는 이른바 ‘부검(autopsy)’ 보고서를 만들었다. 이민 문제에서 유연한 입장을 보이는 등 온건 정당으로 중심을 잡지 않으면 전국 정당의 위상이 추락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보고서의 제안이 제대로 실천된 적도 없지만, 트럼프의 등장은 이제 중도온건 노선으로의 전환을 생각해 볼 여지도 없게 만들었다.
공화당의 미래에 가장 영향을 줄 사안은 트럼프가 퇴장하지 않고, 다시 대선에 나서는 일이다. 현재로서는 그에 대적할 후보는 없고, 당과 현역 의원들은 더욱 트럼프의 눈치를 보고, 그의 개인기에 더욱 기대는 신세로 전락할 수 있다.
트럼프주의의 득세는 보수정당 철학과 이념이 약효가 다한 상황에서, 진보적 정당들이 고학력 엘리트화와 소수집단의 ‘정체성 정치’에 기댄 결과이기도 하다. 민주당이 노동계층 전반의 경제적 이익 및 지위 향상에 성공하지 못하고, 인종·젠더 등 소수집단들의 이슈만을 껴앉는 것으로 진보의 가치를 구현한다고 자위했기 때문이다. 이는 트럼프주의가 백인 중하류층의 분노에 바탕한 또다른 ‘정체성의 정치’ 맞불을 놓을 수 있는 바탕이 됐다.
트럼프주의 득세는 결국 민주당의 정체성 정치가 한계에 달했다는 지적과도 맥을 같이 한다. 공화당이나 민주당이나, 소외됐다고 생각하는 대중들의 열패감과 모멸감을 달랠 정서와 정책이 필요하다. 공화당이 트럼프주의의 포로가 될 것인가 여부는 공화당만의 숙제가 아닌 셈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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