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이 세상을 떠나자, 19일(현지시각) 시민들이 워싱턴 연방대법원 앞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긴즈버그 대법관의 사진과 촛불을 들고 그의 영면을 기원하고 있다. 워싱턴/UPI 연합뉴스
“오늘날 여성이 직면한 고용 차별은 소수집단의 차별만큼 만연해 있지만 훨씬 교묘해 알아채기 어렵습니다. 성별에 따른 차별은 여성이 열등하다는 편견을 낳고 낙인으로 작용해 여성 보호란 미명하에 여성의 고소득 취업과 승진을 방해합니다. 이러한 차별의 결과로 여성의 사회 진출은 제약받고 여성은 늘 남성보다 낮은 지위에 머무릅니다.”
지난 18일(현지시각) 저녁 췌장암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이 1973년 ‘프론티에로 대 리처드슨’ 소송에서 변호인으로 한 변론의 일부다. ‘군인 가족들에 대한 혜택이 성별에 따라 달리 주어지는 것이 차별’인지를 가리는 게 소송의 쟁점이었다. 긴즈버그는 ‘여성에게 특혜를 달라는 게 아니다. 우리 목을 밟고 있는 그 발을 치워달라는 것뿐’이라는 노예제 폐지론자 세라 그림케의 말을 인용하며 성차별이 인종차별과 다를 바 없음을 드러내 승소했다. 2020년 대한민국 법정에서 들어도 낯설지 않을 이 변론은 미국을 넘어 세계 여성 인권사에 한 획을 그은 명변론으로 기록됐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1993년 긴즈버그를 미국 역사상 두번째 여성 연방대법관이자, 첫번째 여성 유대인계 대법관으로 지명하면서 “대법관 자리가 아니더라도 이미 역사 교과서에 실릴 만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여성 인권 향상에 힘써왔음을 평가한 것이다. 하지만 지난 27년간 대법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그의 공헌은 여성 인권 향상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성 부부가 누리는 혜택을 동성 부부는 받을 수 없도록 한 ‘결혼보호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내는 등 성소수자 보호와 투표권, 이민, 사형제 등 다양한 의제에서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며 미국 사법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긴즈버그를 ‘세상의 모든 차별에 맞서 인권을 추구한 인물’로 만들어준 건 차별의 경험이었다. 그는 1933년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여성의 역할을 가사와 육아로 한정 짓고, 여성을 2등 시민 취급하던 시절이었다.
변호사가 되고자 진학한 하버드대 법대에서조차 차별에 직면해야 했다. 500명 중 여학생은 단 9명. 교수들은 9명의 여학생들 면전에서 “남자들의 자리를 빼앗고 있다”고 노골적인 차별 발언을 쏟아냈다. 컬럼비아대 법대로 옮긴 뒤 수석 졸업을 했지만 그에게 일자리를 제안하는 로펌은 어디에도 없었다. ‘유대인이자 여성, 어머니’라는 세가지 차별에 직면했던 것이다. 긴즈버그는 2007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도리어 “운이 좋았다”며 “월가의 로펌이 나를 고용했더라면 오늘날 내가 뭐가 됐겠냐”고 말했다.
1963년 그가 럿거스대에서 교편을 잡을 무렵, 미국 사회에선 민권운동 진전에 힘받아 성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내성적이고 진지한 성격인 긴즈버그는 시위에 앞장서는 대신 성차별 관련 소송 변론을 맡아 여성 인권 향상에 기여했다. 그는 미 수정헌법 제14조가 보장한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의 보장 범위를 여성에까지 확대하는 전략을 통해,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이뤄진 6개의 성차별 소송 중 5개를 승소로 이끌었다.
특히 남성이 차별받는 사건도 변론하며, 여성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은 법이 실제로는 ‘여성이 남성에게 의존해야만 한다’는 인식을 강화시키고 있는 것을 드러냈다. 1975년 남성이라는 이유로 자녀를 부양하는 한부모 가정에 주어지는 특별수당을 받지 못한 것은 성차별이라며 제기한 ‘와이즌펠드 대 와인버거 사건’이 그 예다.
법전에 충실한 판결을 고집하는 보수적 법관들과는 달리 “판사는 그날의 날씨가 아닌 시대의 기후를 고려해야 한다”(2015년 미시간대 법대 학생들과의 만남에서의 발언)는 자세를 취했지만, 처음부터 그가 법원 내 진보파로 불렸던 건 아니다. 법관들의 합의를 중시하고, 판례를 쌓아가며 단계적 변화를 추구해온 그는 오히려 합리적인 중도파로 분류되곤 했다.
그가 법원 내 진보계로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건 2006년 샌드라 데이 오코너 대법관의 퇴임으로 연방대법원 내 유일한 여성 대법관이 되면서부터라고 <뉴욕 타임스>는 지적했다. 그는 이 시기 이후 법정에서 소수의견을 낭독하며 다수의견에 대해 적극적인 반대 의견을 펼치기 시작했다. 긴즈버그는 2007년 인터뷰에서 반대 의견을 적극 개진하는 이유에 대해 “동료 법관들을 설득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훗날의 지성들에게 호소하기 위해서”라고 밝힌 바 있다.
그의 이런 뜻은 ‘미래 세대’에게도 가닿았다. 2013년 연방대법원이 5 대 4로 ‘투표권법’ 4조를 무효화하는 결정(셸비 카운티 대 홀더 소송)을 내렸을 당시 그가 낸 반대 의견에 젊은층이 열광했다. 투표권법은 미국 민권운동의 결과로 소수인종에 대한 참정권 차별 감시를 위해 1964년 만들어진 법인데, 당시 재판에서 로버츠 대법원장을 비롯한 보수 성향의 판사 5명은 ‘50년 동안 미국 사회가 충분히 변했다’며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결정했다. 긴즈버그는 이에 대해 “투표 과정의 인종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오늘 판결은 폭풍이 여전히 몰아치는데도 우산을 버린 꼴”이라고 강한 반대 의견을 냈다. 새삼 사법부 역할의 중요성을 깨달은 젊은이들은 “루스 없이는 진실도 없다”며 열광했다. 긴즈버그의 이름 이니셜과 미국 인기 래퍼 노토리어스 비아이지(B.I.G.)의 이름을 합쳐 ‘노토리어스 아르비지(R.B.G.)’라고 부르고, 그의 모습을 문신으로 새겨 넣는 이들까지 나왔다.
적극적인 반대 의견 표명은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연방 대법원이 5 대 4의 ‘보수 대 진보’ 구도로 바뀌며 더욱 도드라졌다. 그는 숨지기 며칠 전까지 “나의 가장 강렬한 소망은 새 대통령이 취임할 때까지 교체되지 않는 것”이라는 소망을 피력하며, 트럼프 치하 대법원의 지나친 우경화로 미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것을 막고자 분투했다.
긴즈버그의 별세 소식에 미국 사회에선 “지칠 줄 모르는 굳건한 정의의 수호자”(존 로버츠 미 연방대법원장), “모두를 위한 인권을 맹렬하게 추구한 여성”(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후보)을 잃었다는 애도가 이어지고 있다. 긴즈버그와 내내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왔던 트럼프 대통령도 “긴즈버그가 남긴 유산과 미국 역사에 대한 공헌은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내고 백악관과 모든 연방정부 건물에 조기 게양을 지시했다. 이날 밤 워싱턴에선 성소수자들의 무지갯빛 깃발이 나부끼는 등 긴즈버그로부터 도움을 받은 이들의 밤샘 추도회가 이어졌다.
이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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