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 우파 야당 사회민주주의운동 소속 제닌 아녜스 상원 부의장(가운데)이 12일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 사퇴 이후 권력 공백 사태를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임시 대통령에 취임하겠다고 밝힌 뒤, 지지자들을 만나고 있다. 라파스/EPA 연합뉴스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의 사퇴 이후 볼리비아의 혼란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야당의 제닌 아녜스 상원의원(상원 부의장)이 12일 ‘임시 대통령’을 자처하고 나섰다. 대통령 직무대행을 맡아야 할 부통령·상원의장·하원의장이 모두 모랄레스와 동반 사퇴한 만큼, 권력공백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다음 순번인 자신이 임시 대통령직을 맡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회 다수당인 여당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이뤄진 대통령직 승계 강행에, 모랄레스 지지층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볼리비아 우파 야당 사회민주주의운동 소속 아녜스 상원 부의장이 12일 오후 의회에서 공석이 된 상원 의장직을 승계한 뒤 “즉시 (임시)대통령으로 취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나라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라며 최대한 빨리 새로운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고 밝혔다. 야당 후보로 지난달 대선에 출마했던 카를로스 메사 전 대통령은 이 결정을 환영했고, 대선 불복 시위를 주도해온 루이스 페르난도 카마초는 13일 자정을 기해 총파업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볼리비아 대통령직 사퇴를 선언한 뒤 멕시코로 망명한 에보 모랄레스 전 대통령(오른쪽)이 12일 멕시코시티 공항에 도착해 손을 흔들고 있다. 멕시코시티/로이터 연합뉴스
모랄레스 지지층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의회 앞으로 몰려들어 항의 시위를 벌였다고 <에이피>(AP) 통신이 전했다. 아녜스 의원의 대통령직 승계 선언이 이날 여당 사회주의운동 의원들이 불참해 의사정족수를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모랄레스 지지층은 미주기구(OAS)가 대선에 ‘부정’이 있었다는 감사 결과를 발표한 뒤 군부가 모랄레스에게 퇴진을 요구한 것을 ‘쿠데타’로 규정하며, 모랄레스 망명 이후에도 항의 시위를 계속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모랄레스가 지난 10일 ‘재선거’를 치르겠다고 발표한 지 몇 시간도 안 돼 퇴진을 발표하고 멕시코 망명에 나서게 된 데는 군과 경찰의 체포 ‘위협’ 등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날 망명지 멕시코에 도착한 모랄레스 대통령도 이번 사태를 두고 “역사상 가장 교활하고 가증스러운 쿠데타”라고 비난하며 “살아있는 한 정치를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모랄레스 사퇴를 둘러싼 논란은 볼리비아 내부는 물론 중남미와 미국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모랄레스의 사퇴가 독재로 치닫는 대통령에 국민이 제동을 건 ‘민주주의의 정당한 승리’라는 주장과 친미 우파 정부를 세우려는 미국이 배후에 선 ‘군부 쿠데타의 결과’라는 비판이 격렬하게 맞붙는 형국이다. 미국 정부가 전자라면,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비롯한 중남미 좌파 지도자들은 후자다. 특히 12일 미국 민주당의 유력 대선 주자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까지 군부 쿠데타 가능성을 언급해 논쟁이 커지는 모양새다. 샌더스 의원은 이날 트위터에 “볼리비아 내 쿠데타 가능성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며 “미국은 폭력 사태의 종식을 촉구하는 한편, 볼리비아의 민주적 제도를 지지해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
이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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