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아이다호주 북부 코들레인의 공공도서관에서 ‘책’들이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다. 지난해 8월부터다. 공교롭게도 <건스 다운> 등 총기규제 필요성이나 여성 참정권, 성소수자의 인권 문제 등 주로 ‘진보적’ 시각이 담긴 책들이다. 특히 <화염과 분노> 등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담긴 책은 절반가량이나 자취를 감췄다.
도서관 관계자들은 얼마 전 익명의 인물이 건의함에 남긴 편지를 보고 누군가 ‘고의’로 책을 감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편지 속엔 “젊은 사람들 손에 이런 선동 글들이 닿지 않도록 나는 계속 이 책들을 안 보이는 데 숨길 것이다. 너희 진보주의자들이 우려하는 걸 보는 게 내겐 큰 기쁨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지난 몇달 동안 진보적 시각에서 쓰인 책들이 생뚱맞게 ‘10대용 서적’ 코너에서 발견되거나, 제목이 보이지 않도록 책등이 안쪽으로 꽂혀 있었던 게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알게 됐다.
<뉴욕 타임스>는 11일 코들레인에서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의문의 책 실종’ 사건을 전하며,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는 백인우월주의의 한 단면을 소개했다. 코들레인은 백인·보수주의 성향이 강한 도시로, 악명 높은 백인우월주의자들의 모임인 ‘아리안 네이션스’의 본부가 있는 지역이다.
매해 전세계 네오나치들의 연례 회의가 열리는 이곳에서 책 분실 사건이 벌어진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6년, 코들레인시가 인종차별 단체 등과 맞서 싸운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한 ‘라울 발렌베리 시민 용기상’ 상금으로 홀로코스트나 미국 흑인 박해사 등을 다룬 인권 서적을 구매해 도서관에 비치한 이후, 관련 책들이 잇따라 없어진 것이다.
심각한 건 얼굴 없는 이 범인이 일부 지역 시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벳 애먼 코들레인 공공도서관 관장은 지역 방송이 책 분실 문제를 보도한 뒤, 도서관이 진보주의자들의 시각을 담은 책만 선보이고 있다고 항의하며 책을 숨긴 사람을 지지한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뉴욕 타임스>에 전했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반동적인 분위기에 맞서기 위한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자신이 쓴 책 <커맨더 인 치트>를 비롯해, ‘반트럼프’ 성향의 책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저자 릭 라일리는 도서관 곳곳에 책을 비치할 수 있도록 자신의 책 10권을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이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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