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의 주한 미국대사직 내정이 철회된 것으로 확인됐다. 주재국 정부한테 아그레망(임명 동의)까지 받은 내정자의 지명이 철회된 것은 외교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다. 한국 정부는 한달여 전에 차 석좌에 대한 아그레망을 보낸 바 있다.
백악관 관계자는 30일(현지시각) <한겨레>에 “차 석좌가 더 이상 (주한 미국대사) 지명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확인해줄 수 있다”며 “현재로선 제공할 만한 다른 정보는 없다”고 밝혔다.
차 석좌의 낙마 이유로는 백악관과의 ‘정책 이견’이 꼽힌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날 “차 석좌가 북한을 제한적으로 타격하는 방안, 즉 ‘코피 전략’으로 알려진 위험한 개념에 대해 국가안보회의(NSC) 관료들에게 우려를 제기했다”고 전했다.
‘코피 전략’은 북한과 전면전으로 나아가지 않으면서도 핵시설 등에 대한 국지적 타격을 통해 북한에 강한 메시지를 주겠다는 개념 수준의 전략을 일컫는다. 하지만 한국 및 일본에 대한 북한의 반격 가능성을 확실히 알 수 없고, 은폐된 모든 핵·미사일 시설을 제거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대다수 전문가들은 ‘비현실적이고 위험한 전략’이라고 비판해왔다. 또한 차 석좌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기업들에 불공정하다고 주장해온 한국과의 무역협정을 파기하려고 위협하는 것에도 반대했다고 이 신문은 밝혔다.
차 석좌의 지인도 이날 <한겨레>에 “한국 정부로부터 아그레망이 온 뒤 지난달 말께 차 석좌가 백악관과 정책 논의를 했다”며 “그 뒤로 백악관 쪽에서 아무 연락이 없었다”고 말했다. 정책 논의 과정의 이견 표출이 낙마의 한 원인이었음을 시사한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담당자들이 최근 차 석좌에게 대북 군사공격이 임박할 경우 한국 내 미국인들의 대피를 도울 준비가 됐는지를 물었는데, 차 석좌가 대북 군사공격에 회의적 반응을 보인 것이 결정적인 낙마 이유로 작용했다고 보도했다. 차 석좌도 낙마 소식이 알려진 뒤 <워싱턴 포스트>에 ‘북한 코피 터트리기는 미국인들에게 막대한 위험을 끼친다’는 제목의 기고를 실어 “대북 공격은 북한의 미사일 프로그램을 지연시킬 뿐, 위협을 막지는 못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검증 과정에서 뒤늦게 부적격 사유가 발견됐다는 보도도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날 두 명의 당국자 말을 빌려 “정책 이견이 차 석좌를 배제한 유일한 이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전했다. 한 당국자는 차 석좌를 낙마시킨 결정은 검증 과정에서 이뤄졌다고 이 신문에 밝혔다. 하지만 검증 과정에서 문제가 발견됐더라도 이를 담당하는 연방수사국(FBI)이 아그레망 신청 이전에 걸러내지 못한 것 자체가 트럼프 행정부의 난맥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 전문가는 밝혔다.
차 석좌 지명 철회로, 1년가량 이어진 주한 미국대사 공석 사태는 장기화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대다수 외교·안보 전문가들이 2016년 대선 때 ‘반트럼프’ 서명운동에 참여해, 충성심을 강조하는 트럼프 행정부가 인물난에 허덕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또한 차 석좌의 낙마 이유 가운데 하나가 정책 이견이라면, 새 지명자는 논리적으로 ‘코피 전략’을 옹호할 텐데, 한국 정부가 이런 인물을 대사로 수용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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