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13일 워싱턴에서 열린 애틀랜틱카운실과 한국국제교류재단 주최의 포럼에 참석해 북한에 대한 조건 없는 대화 의지를 밝히고 있다. 워싱턴/신화 연합뉴스
미국 백악관이 13일(현지시각)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의 ‘전제조건 없는 만남’이라는 전날의 대북 제의에 공식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틸러슨 장관의 발언은 하루 만에 ‘없던 일’로 돼버렸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미숙한 정책 조율 과정을 그대로 보여줬다는 지적이 나온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관계자는 이날 틸러슨 장관의 제안에 대한 입장을 묻는 <한겨레>의 질의에 “대북 정책은 바뀌지 않았다. 분명히 지금은 (대화의) 때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북한은 우선 추가적인 도발을 자제하고 비핵화를 향한 진지하고 의미 있는 조처를 취해야 한다”며 “이것(대화의 전제조건)은 추가적인 핵이나 미사일 실험을 안 하는 것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과의 어떤 협상도 북한 정권이 근본적으로 태도를 개선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일치된 주장을 하고 있다”며 “과거의 잘못된 정책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반복해서 얘기했듯이 북한과의 대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면서도, 정확한 대화 시기와 관련해선 “보면 알게 될 것”이라며 모호하게 답변했다.
틸러슨 장관은 전날 워싱턴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서 “전제조건 없이 북한과 첫 회동을 할 준비가 돼 있다. 북한이 핵프로그램을 포기할 준비를 하고 (대화) 테이블로 돌아오라고만 얘기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며 적극적인 대화 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 틸러슨 장관의 발언은 오랫동안 대북 대화 재개 조건으로 굳어져온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 있는 의지 및 행동’을 내려놓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 것이어서 주목을 받았다. 백악관의 공식 입장은 전날 국무장관의 발언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헤더 나워트 국무부 대변인도 13일 정례브리핑에서 “북한이 평화로운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신뢰할 만한 대화를 할 의지가 있다면 우리는 대화에 열려 있다”며 백악관과 입장을 맞췄다.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는 “미국에서는 틸러슨 장관이 임명된 지 1년이 되는 내년 2월에 경질된다는 얘기가 기정사실로 통한다”며 “틸러슨 장관이 남은 임기에 소신대로 대화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이었다고 보인다. 여러 반응을 보면 결국 조율되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한 외교 소식통도 “틸러슨 장관의 언급은 준비된 원고를 읽은 토론회 앞부분이 아니라 질의응답 과정에서 나왔다”며 ‘개인적 소신’이라는 해석에 무게를 뒀다.
노규덕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틸러슨 장관과 백악관의 ‘입장 차’에 대한 질문에 “한-미 양국은 북한이 도발과 위협을 중단하고 하루속히 대화에 복귀할 것을 일관되게 촉구해오고 있다”며 “백악관 쪽의 반응도 이런 입장을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으로 이해가 된다”고 말했다.
백악관과 틸러슨 장관의 엇박자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틸러슨 장관이 지난 9월 “북한과 두세 개 정도의 대화 채널을 열어두고 있다”고 말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바로 이튿날 “시간 낭비”라며 면박을 줬다.
트럼프 행정부의 일관된 대북 메시지 부재는 동맹국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북한도 미국의 협상 의지를 의심하게 만들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틸러슨 장관의 발언에 대해 적극적인 환영 의사를 표시했던 중국과 러시아도 머쓱하게 됐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김지은 성연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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