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의 테러지원국 재지정을 발표한 20일 백악관 각료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왼쪽은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 워싱턴/UPI 연합뉴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특사로 북한을 방문했던 쑹타오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면담은 성사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쑹타오 특사가 베이징으로 복귀한 지 채 하루도 안 된 20일(현지시각) 북한을 9년 만에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을 계기로 희미하게나마 싹트던 대화 탐색 움직임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한반도 정세가 다시 ‘강 대 강’ 구도로 향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각료회의를 주재하면서 머리발언을 통해 “북한은 핵 초토화로 전세계를 위협하는 것에 더해, 외국 영토에서의 암살 등을 포함해 국제 테러리즘을 지원하는 행동들을 반복적으로 해왔다”며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한다고 발표했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 냉각탑을 폭파하고 핵 검증에 합의해 2008년 10월 테러지원국에서 해제된 지 9년 만이다. 이로써 북한은 이란과 수단, 시리아에 이어 네번째로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재지정에 따라 북한 및 관련 개인·단체에 대한 추가적인 제재와 불이익을 가할 것”이라며 “이번 지정은 살인 정권을 고립화하려는 우리의 ‘최대의 압박’ 공세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재무부가 내일 북한에 대해 추가제재를 발표할 것이다. 대규모이고, 앞으로 2주에 걸쳐 이뤄지게 될 것”이라며 “2주가 지나면 제재는 최고 수준이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추가제재에는 중국 기업들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출구 없는’ 총체적 대북 제재·압박 국면으로 끌고 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셈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북한 테러지원국 재지정은 ‘북한이 대화 의사가 없다’는 미국 쪽 정세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미-중은 지난 9일 정상회담을 통해 쑹타오 특사를 통한 북한의 협상 의사 타진에 합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 테러지원국 재지정을 사실상 결정한 상태에서 발표 시기를 잠시 미뤄뒀던 것도, 쑹타오 특사의 방북을 통해 북한의 ‘최종 의사’를 확인하기 위한 절차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테러지원국 재지정 배경에는 미국 내 강경한 대북 분위기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국무부는 테러지원국 지정 요건으로 “국제 테러리즘을 반복적으로 지원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김정남 암살’을 북한의 테러 행위라고 쳐도 “반복적인” 테러지원 행위의 근거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 국무부 내 법률팀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북한에 억류됐다 풀려난 뒤 사망한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 사건으로 매파 중심의 미 의회를 중심으로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미국의 북한 테러지원국 재지정이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복귀시키는 지렛대 역할을 하기보다는 북한의 강한 반발을 불러 정세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2008년 테러지원국 지정이 해제되기 전에도 ‘테러 모자’를 쓰고 협상장에 나갈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워싱턴 가톨릭대 정치학과의 앤드루 여 교수도 <월스트리트 저널>에 “미국과의 관계 복원에 추가 장애물을 놓아 외교적 개입을 향한 문을 닫아버린 셈”이라고 비판했다.
게다가 최근 한-미가 동해에서 핵항모 3척을 동원한 연합훈련을 하면서 북한 내부의 긴장도 상당히 높아진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북한은 반민반관 대화 등을 통해 비핵화 논의는 할 수 없으며 미국이 ‘한-미 연합훈련 중단이나 전략자산 철수’와 같은 성의 있는 행동을 먼저 보이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미국의 테러지원국 재지정은 북한 입장에선 자신들의 요구에 대한 명백한 거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북한의 향후 행보와 관련해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는 “단기적으로는 앞으로 북한이 도발적인 행태로 반응하며 완강한 태도를 보일 수 있다”고 예상했다.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도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한 여파로) 북한은 연내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시험 발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60일 넘게 이어온 북한의 ‘자제 기간’이 끝날 수 있다는 얘기다.
국가정보원도 지난 20일 국회 정보위원회 보고에서 “북한이 ‘미사일 성능 개량과 평화적 우주개발’을 목적이라고 하며 탄도미사일을 발사할 가능성을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이 인공위성을 발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국면 경색이 예상되는 가운데 대화와 협상을 위한 모멘텀이나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는 주체들의 입지가 크게 좁아졌다는 점도 정세 유동성을 높이고 있다. 우선 중국은 쑹타오 특사의 방북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어서, 중재자로서 운신의 폭이 더욱 좁아졌다. 중국 정부는 지난달 당대회 개최 전에 북핵 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찾기 위한 고위급 논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찌 보면 이번 쑹타오 방북은 시 주석의 권력 강화 이후 첫 외교 시험대였지만, 암초에 부딪힌 모양새가 됐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정책 주도권도 테러지원국 재지정을 계기로 강경 분위기의 백악관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협상파인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의 입지가 좁아지면서 그의 거취도 더욱 불투명해졌다. 틸러슨 장관이 이날 오후 백악관 브리핑에서 “여전히 (대북) 외교에 대한 희망은 있다”고 밝혔지만, 독자적인 국무부 힘으로 계기를 마련하기는 당분간 쉽지 않아 보인다. 평창겨울올림픽을 코앞에 둔 한국 정부 입장에선 정세 관리 부담이 더욱 커졌다고 볼 수 있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노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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