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 AP 연합뉴스
미 NBC “틸러슨 장관이 회의 때 트럼프를 멍청이로 불러” 보도
틸러슨 “대통령에 헌신 강해”, 트럼프 “완전신임”…일단 봉합
국무부 “그런말 한적 없다”…NBC “망할놈의 멍청이라 했다”
스타일 다르고 사사건건 정책 의견차…‘화학적 재결합’ 어려워
틸러슨 “대통령에 헌신 강해”, 트럼프 “완전신임”…일단 봉합
국무부 “그런말 한적 없다”…NBC “망할놈의 멍청이라 했다”
스타일 다르고 사사건건 정책 의견차…‘화학적 재결합’ 어려워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멍청이’(Moron)으로 불렀다는 보도가 4일(현지시각) 미국 정가를 하루종일 들쑤셔놓았다. 틸러슨 장관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트럼프 대통령도 신임을 표시하면서 가까스로 사태는 봉합됐지만, 가뜩이나 불화설이 흘러나오던 두 사람이 다시 화학적 결합을 하는 것은 물건너갔다는 전망이 많다.
이날 아침 미국 <엔비시>(NBC) 방송이 틸러슨 장관이 지난 7월 트럼프 대통령과 외교 정책을 놓고 갈등을 빚었으며, 심지어 대통령을 ‘멍청이’로 부르기도 했다는 단독보도를 내보내면서 국무장관 사임설과 경질설이 확산됐다.
<엔비시> 보도는 꽤 구체적이었다. 틸러슨 장관이 지난 7월 20일 국방부에서 국가안보팀 및 내각 관계자들과 2시간여 회의를 한 뒤 공개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을 “멍청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전날인 19일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 상황실 회의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미 사령관을 해임하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해 참석자들을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다.
그 뒤로도 틸러슨 장관의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좌절은 이어졌다. 지난 7월 말,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보이스카우트 잼버리 대회의 연설에서 워싱턴 정가와 주류언론, 야당을 싸잡아 비난하는 ‘정치 연설’로 엄청난 비난에 휩싸였다.
미래 세대를 대상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만 설파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한때 보이스카웃을 이끌던 틸러슨 장관은 상당히 격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트럼프 장관의 연설 당시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인 텍사스에 머물런 틸러슨 장관은 연설 내용을 듣고 워싱턴으로 복귀하지 않겠다고 위협했다고 방송은 전했다.
틸러슨 장관은 마이크 펜스 부통령의 중재 및 존 켈리 당시 국토안보 장관과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등의 만류로 내각에 남았다. 실제로 당시 미 언론들은 상세한 내용은 보도하지 않았지만 틸러슨 국무장관의 사퇴가 임박했으며 후임으로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국 대사가 물망에 오르내린다는 보도까지 하기도 했다. 따라서 <엔비시> 보도의 가장 핵심적인 새로운 내용은 틸러슨 장관이 ‘트럼프 멍청이’라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나라에서든 장관급 인사가 자신이 보좌하는 대통령을 두고 공개적인 회의 자리에서 ‘멍청이’라고 비난을 했다면 예삿일이 아니다. 당장 사표를 내야하거나, 대통령이 경질을 해야 할 사안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날 일단 봉합하는 수순을 택했다. 틸러슨 장관은 <엔비시> 보도 몇시간 뒤 기자회견을 통해 “대통령에 대한 나의 헌신은 여전히 강하다. 전혀 사퇴를 고려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내가 대통령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유용할 수 있다고 대통령이 느끼는 한 나는 이 자리에 있겠다”고 말했다.
틸러스 장관의 기자회견 뒤 몇분 만에 트럼프 대통령도 트위터 글을 통해 해당 보도를 “가짜 뉴스”라며 책임을 언론에 돌렸다. 틸러슨 장관의 기자회견을 지켜보고 있었던 셈이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최악의 총기 참사가 발생한 라스베이거스를 방문한 자리에서 기자들과 만나 틸러슨 장관을 “완전히 신임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해명과 수습 노력에도 이날 하루종일 ‘멍청이’ 표현을 둘러싼 진실공방은 뜨겁게 이어졌다. 틸러슨 장관이 해명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멍청이’라고 비난한 사실을 직접 부인하지 않았다는 보도가 나오자, 헤더 노어트 국무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국무장관은 미국 대통령에 대해 말하면서 그런 종류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재차 해명해야 했다. <엔비시> 방송의 한 기자는 “내 소식통은 틸러슨 장관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멍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망할 놈의 멍청이(f***ing Moron)’라고 불렀다고 한다”는 자사 앵커 발언을 트위터로 올려 반박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여러차례 생채기가 나서 쉽게 아물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틸러슨 장관이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느끼는 좌절감 못지 않게, 트럼프 대통령도 틸러슨 장관에 상당한 실망감을 느끼고 있다는 보도가 심심찮게 나왔기 때문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달 1일 트럼프 대통령 친구들의 말을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은 틸러슨을 완전히 주류 기득권으로 본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또한 <시엔엔>(CNN) 방송은 이날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은 <엔비시> 보도가 나오기 전에 이미 틸러슨 장관이 지난 여름 국방부 회의에서 자신을 ‘멍청이’라고 모욕적으로 부른 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전했다.
두 사람은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다. 둘다 비즈니스 쪽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부동산 사업가로 힘과 협박에 의한 협상에 능하며 엔터테이너 기질이 다분한 아웃사이더다. 이에 비해 틸러슨은 공화당 주류 세력을 대표하며 실제 조지 부시 대통령과 그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콘돌리자 라이스 등의 추전으로 국무장관에 입각했다. 공화당 주류의 돈줄인 석유사업, 즉 엑손모빌 최고경영자(CEO)가 그의 주요 사업경력이다.
정책 노선을 둘러싼 의견차는 사사건건 노출됐다. 파리기후변화 협약 탈퇴는 물론이고, 지난 6월 중동 10개국과 카타르의 단교, 지난 8월 트럼프 대통령의 ‘화염과 분노’ 발언 때마다 틸러슨 장관은 마지못해 소방수로 나서야 했다. 또한 지난 8월엔 트럼프 대통령이 백인우월주의를 인정하는 듯한 샬러츠빌 유혈 사태 대응을 놓고 틸러슨 장관이 상당한 실망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엔 북핵 문제 해법을 둘러싸고 두 사람의 골이 더 깊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지난 1일 ‘북한과 대화를 탐색하고 있다’고 중국 방문 과정에서 밝힌 틸러슨 장관의 하루 전 발언에 대해 “시간 낭비”라며 공개적으로 면박을 줬다. 틸러슨 장관이 대통령의 신임을 얻지 못하는 인상을 심어줘 정상적인 업무 수행을 하기 어렵게 만들어버렸다.
이번에 다시 두 사람의 갈등이 노출되면서 북한과의 협상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틸러슨 장관과 국무부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가능성이 높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 및 방중 과정에서 트럼프 행정부 내부의 대북 정책을 둘러싼 혼선과 난맥상도 쉽게 가닥이 잡히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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