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23일 9명이 갇혀 사망한 트레일러를 조사하고 있다. 샌안토니오/AP 연합뉴스
22일 자정, 멕시코 국경과 인접한 미국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의 월마트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트레일러에서 한 남자가 뛰쳐나왔다. 방향감각을 잃은 듯 비틀거리던 그는 월마트 직원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했다. 물을 가져다준 직원은 트레일러를 수상히 여겨 경찰에 신고했다. 트레일러 안에는 39명의 불법 이민자가 있었다. 8명은 이미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병원으로 옮겨진 31명 가운데 추가로 1명이 숨졌다. 살아남은 30명 가운데 17명은 중태라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23일 보도했다.
‘아메리칸드림’을 좇아 미국-멕시코 국경을 넘는 불법 이민자를 상대로 벌이는 브로커들의 비인간적인 행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번 사건은 사망자 수로 보면 2003년 5월 텍사스 남부에서 휴스턴으로 가던 트레일러에 탄 멕시코 등 중미 출신 밀입국자 100여명 가운데 19명이 숨진 이후 최악이다.
이번에도 트레일러는 냉장차로 위장했지만 에어컨은 작동하지 않았다. 안에는 물도 없었다. 오후 5시께 외부 온도는 38도였고, 철제 트레일러 안 온도는 78도까지 치솟았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퍼낸도 시민들이 23일 트레일러에 갇혀 숨진 이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고 있다. 샌퍼낸도/AP 연합뉴스
찰스 후드 샌안토니오 소방국장은 “트레일러에 있던 사람들을 만져보니 피부가 매우 뜨거운 상태였다”며 “열사병과 고온 장애, 탈수 증상으로 상당수가 회복할 수 없는 뇌손상을 입을 것 같다”고 말했다. 윌리엄 맥매너스 샌안토니오 경찰국장은 기자회견에서 “끔찍한 비극”이라며 “우리는 오늘 밤 인신매매 범죄의 현장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토머스 호먼 미국 이민세관국 국장대행은 초기에 100명 이상이 트레일러에 샌드위치처럼 갇혀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월마트 폐회로텔레비전(CCTV)을 보면, 나머지 인원들은 경찰이 오기 전에 숲속으로 도망가거나 다른 차들이 와서 데려갔다. 세관국경보호국의 한 관리는 “트레일러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걸어서 국경을 넘어온 뒤 어디론가 수송되던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생존자 몇몇은 멕시코에서 왔다고 밝혔지만 국적 등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4명은 10~17살 청소년으로 보인다고 호먼 국장대행은 말했다. 또 트레일러 운전자는 플로리다주 클리어워터에 거주하는 제임스 매슈 브래들리 주니어(60)로 확인됐지만, 트레일러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샌안토니오에 얼마나 머물렀는지, 어디로 가는 중이었는지에 대해선 수사가 진행중이다.
미국-멕시코 국경 경비를 강화하고 장벽을 설치하려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이 위험을 무릅쓴 밀입국 시도를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영국 위험분석 컨설팅업체인 베리스크 메이플크로프트는 최근 보고서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해진 국경 치안 정책이 이민자들로 하여금 더 위험한 밀입국 방법을 감수하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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