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측근들의 러시아 유착 의혹을 수사해온 제임스 코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을 전격 경질하고 수사에 개입하려 한 정황까지 드러나면서, 미국 정치권과 학계에서 ‘탄핵론’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물론 아직은 트럼프 대통령을 탄핵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시엔엔>(CNN) 방송은 13일 민주당 의원 가운데 하원 10명, 상원 1명이 트럼프 대통령 탄핵을 언급한 것으로 집계됐다고 보도했다. 그동안 민주당 의원들은 섣부른 탄핵 논의가 여론의 역풍을 맞을 것을 우려해 자제해왔는데, 코미 국장 경질 이후 분위기가 달라진 것이다. 해임 사건 이전에는 ‘소신파 의원’ 1~2명만 간헐적으로 탄핵 얘기를 꺼냈다.
하킴 제프리스 하원의원은 12일 트위터로 “트럼프가 사법 방해 노력을 한 증거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며 “트럼프를 감옥으로”(lock him up)라고 적었다.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이 “힐러리를 감옥으로”(lock her up)라고 외친 것을 패러디한 것이다.
맥신 워터스 하원의원도 <엔비시>(NBC)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재판을 받을 수도 있고, 아마 사법방해죄로 기소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며 형사처벌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마크 포캔 하원의원은 “탄핵 시계가 있다면, 코미 해임은 이를 1시간이나 앞당겼다”고 평가했다.
학계에서도 탄핵 논의가 터져나오고 있다. 로런스 트라이브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는 ‘트럼프가 반드시 탄핵돼야 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워싱턴 포스트> 기고문에서 러시아 게이트와 관련한 트럼프의 권력남용이 탄핵 사유로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트라이브 교수는 “현재 진행 중인 수많은 조사 결과를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나라의 운명을 독재적 지도자의 변덕에 맡기는 위험한 행위”라고 경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을 비롯해 미국 대선 결과를 아홉번 연속 맞혀 유명해진 앨런 릭트먼 아메리칸대 교수(정치역사학)도 12일 <뉴스위크>에 “트럼프 대통령은 그를 조사하던 코미 국장한테 개인적으로 충성심을 요구했고, 경질 이유에 대해 거짓말을 해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 당장 탄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탄핵 조사를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탄핵 논의가 꿈틀대고 있지만 아직 분위기가 충분히 무르익은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우선 미국 헌법은 “대통령이 반역, 뇌물, 기타 중대 범죄 및 비행”으로 기소되면 탄핵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중대 범죄’와 관련해 헌법학자들은 “권한 남용, 배덕, 헌법 훼손 등으로 ‘국민의 신임’을 어긴” 경우로 보고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드러난 트럼프 대통령 측근들과 러시아의 유착 혐의나 코미 국장 해임 건만으로는 ‘스모킹 건’(결정적 증거)이 되기엔 부족하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또 탄핵을 위해선 상하원 모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하는데, 모두 여당인 공화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아울러 압도적 여론의 지지가 있다면 공화당 의원들을 움직일 수 있지만, 트럼프 지지층의 결집력도 만만치 않다. 현실적으로 탄핵 가능성 여부는 내년 말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상하원을 탈환하느냐에 달려 있는 셈이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은 코미 국장의 후임 인선을 서두르며 분위기 쇄신으로 파장을 줄이는 한편, 코미 국장을 협박하며 정보 유출 가능성을 차단하는 양동 작전을 벌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13일 후임 인선과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 “절차가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며 “신속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2일 트위터를 통해 “제임스 코미는 언론에 정보를 흘리기 시작하기 전에 우리의 대화 내용을 담은 테이프들이 없기를 바라야 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엔비시> 인터뷰에서 지난 1월 코미 국장과 한 만찬 및 전화통화 내용을 공개하며, 코미 국장이 ‘트럼프 대통령은 수사 대상이 아니며, (나는) 국장직을 유지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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