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를 공식 선언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뒤 서명지를 들어보이고 있다. EPA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각) 미국 등 12개국이 참여한 다자간 무역협정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티피피·TPP) 탈퇴를 공식선언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아울러 앞으로 양자 협상에 기반한 무역협정을 추진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티피피 탈퇴 발표는 지난 22일 트럼프 대통령이 시무식에서 캐나다·멕시코와 북미자유무역협정(나프타·NAFTA) 재협상을 밝힌 지 하루만으로, 미국 국익 중심의 무역협정 재편에 가속도를 붙이고 있는 양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티피피 탈퇴 행정명령에 서명한 뒤 무역대표부에 내려보낸 ‘대통령 메모’에서 “미국을 티피피 서명국에서 탈퇴할 것과, 티피피 협상에서 영구히 철수할 것을 지시한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어 “가능하다면 미국의 산업을 증진하고 미국 노동자를 보호하며, 미국의 임금을 인상시키기 위해 양자 무역 협상을 추진할 것을 지시한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티피피 협상 당사국들에게 이같은 사실을 문서형식으로 통보할 것을 무역대표부에 지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모든 협상에서 미국인과 그들, 특히 노동자들의 재정적 복지를 대변해 그들의 이익에 기여할 수 있는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공정한 무역을 만드는 것이 우리 행정부의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이러한 결과를 확보하기 위해 우리 행정부는 앞으로의 무역 협상에서 개별 국가들과 1대1의 기초 위에서 직접 협상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티피피는 미국과 일본, 싱가포르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 12개국이 참여해 지난 2015년 10월 타결된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이었지만, 공화당이 다수인 의회의 반대로 비준을 받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날 티피피 탈퇴 행정명령 및 메모는 앞으로 미국 무역정책의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시사점이 적지 않게 담겨 있다.
우선, 미국의 힘에 대한 평가가 오바마 행정부 때와 다르다. 오바마 대통령 때 티피피를 추진한 이유 중의 한가지는 미국의 힘만으로는 경제적으로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경제적 연합을 통해 아시아권에서 경제적 활력을 도모해 세를 불리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처럼 티피피의 틀로 견인하거나, 중국이 이를 거부하면 배제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미국 중심의 경제 규칙을 만들어 중국을 여기에 순응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이러한 티피피는 군사 및 외교와 함께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의 핵심 축이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과 1대1로 ‘맞짱을 뜨는’ 전략을 택했다. 일단, 지정학적 대결보다는 실리 위주의 전략인 동시에 중국과의 대결에서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중국과의 협상에서 어느 정도 효력이 있을지는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중국의 내수 시장이 이미 상당히 발달해 있고, 중국의 대미 수출이 줄며 미국의 물가가 오르며, 중국도 보유중인 미국 국채를 매도하거나 미국 기업의 물건 구입을 거부할 수 있는 수단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1대1’ 협상 전략은 중국 등 일부 경제 대국을 제외하고는 다른 국가들에 대한 약탈적이고 공세적인 개방 요구로 이어질 수 있다. 양자 협상은 다자 협상보다 힘과 협상 수단의 우위를 바탕으로 일방적으로 미국의 국익을 관철하기 쉬운 구도기 때문이다. 특히, 이날 숀 스파이서 대변인도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세계 시장에 대한 미국의 접근을 확대하겠다며 공세적인 중상주의를 예고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재협상도 안전지대가 아닌 동시에, 재협상이 이뤄질 경우 미국이 협상의 균형점 찾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밀어부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미국 내에선 찬반이 엇갈렸다. 민주당 대선주자였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이날 “티피피가 사라지게 된 것을기쁘게 생각한다”며 “지금은 미국의 근로자 가정을 돕는 새로운 무역정책을 개발해야 할 때”라고 밝혔다. 이에 비해 존 매케인 공화당 상원의원은 “중국에 경제 규칙을 만드는 빌미를 줄 뿐 아니라 미국이 아·태 지역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골치 아픈 신호를 주게 된다”고 비판했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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