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에 불법 건설해온 유대인 정착촌을 둘러싸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현 정부, 나아가 미국의 신·구 권력이 정면충돌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정부가 임기 만료를 한 달도 안 남겨둔 시점에서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을 강도 높게 비난하며 중동평화의 불씨를 되살리려 안간힘을 쓰는 반면, 다음달 20일 취임하는 도널드 트럼프 차기 정부 진영은 노골적으로 오바마의 중동 정책을 비난하며 이스라엘을 편들고 나서는 모양새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28일 국무부 연설에서 “진지하게 평화를 생각한다면 그 누구도 이스라엘 정착촌이 평화를 위협하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며 “현 상황은 1개 국가와 영구점령으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고 <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 언론들이 전했다. 그는 또 “이스라엘의 현 연립정권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우파적이며 가장 극단적 요소들에 추동되는 의제들을 갖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케리 장관은 70분에 걸친 연설에서, 지난 23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유대인 정착촌 건설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사실상 만장일치로 채택한 데 대해서도 “2국가 해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공정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달성하는 유일한 길”이라며 옹호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친구는 자기 친구를 유엔 안보리에 넘기지 않는다”며 미국의 유일한 ‘기권’을 비난한 데 대한 정면 반박이었다.
존 메리 미국 국무장관이 28일 국무부 연설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법 정착촌 건설을 작심한 듯 강하게 비판하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 평화 공존하는 ‘2개 국가 해법’의 존중을 강조하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케리 장관은 트럼프 당선자를 향한 듯 “일부 사람들은 미국의 이익, 입장, 발언, 원칙들과는 상관없이, 더욱이 (이스라엘에) 정책 변화를 거듭 촉구했음에도, 아무 정책이나 인정하는 것을 미국의 우정이라고 믿는 것 같다”고 꼬집으며 “우정이란 서로 말하기 어려운 진실을 말할 필요가 있고 상호존중을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즉각 성명을 내어 “케리 장관은 정착촌 문제에만 사로잡힌 채 갈등의 뿌리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고 비판했다고 현지 일간 <예루살렘 포스트>가 28일 전했다. 네타냐후는 “중동 전체가 불길에 휩싸이고 국가들이 뒤집히며 테러리즘이 번지고 있는데, 미 국무장관은 중동의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를 공격한다”고 비난했다.
트럼프 당선자는 케리 장관이 연설을 하기도 전에 “이스라엘이 무시되고 무례하게 다뤄지도록 계속 내버려둘 수 없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그는 앞서 지난 주에는 트위터 메시지로 “이스라엘, 굳세게 버텨라. 1월20일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며 중동정책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했다.
존 매케인 상원 군사위원장(공화당)도 케리 장관의 연설을 “기껏해야, 물러나는 행정부가 말년에 늘어놓는 초점 없는 장광설”이라고 폄하했다. 공화당은 다음달 트럼프 정부 출범에 맞춰, ‘유엔 규탄 결의안’과 ‘오바마 규제 백지화 법안’을 우선 처리하기로 가닥을 잡았다고 미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가 28일 공화당 의회 소식통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한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1993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평화 로드맵인 오슬로 협정에 합의한 바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 이스라엘군의 점령지 철수, 지속적 평화협상, 그리고 궁극적으로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을 통한 ‘2개 국가’ 평화 공존이 뼈대다. 당시 이스라엘의 시몬 페레스 대통령과 이츠하크 라빈 총리,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 등 3명은 이 평화협정의 공로로 이듬해인 1994년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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