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현지시각) 저녁 7시14분, 푸르스름한 어둠이 붉은 석양의 마지막 남은 빛을 삼킬 무렵, 활주로에 비행기 한 대가 내려앉았다. 동체 앞머리엔 ‘트럼프-펜스’, 뒤쪽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영문 알파벳이 큼직하게 새겨져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를 보기 위해 노스캐롤라이나주 킨스턴 제트센터 유세장에서 그를 기다리던 지지자 1천여명은 “트럼프, 트럼프”를 연호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트랙이 설치되고 비행기 문이 열렸지만, 트럼프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13분 뒤 또다른 비행기 한 대가 더 짙어진 어둠 속에서 활주로를 가르며 내렸다. 비행기엔 ‘트럼프’라는 영문글자만 큼직하게 새겨져 있었다.
활주로에 설치된 연단까지 채 50m도 안 되는 거리까지 접근한 비행기에서 트럼프가 나타나더니, 웃음을 띠며 손을 흔들었다. 트럼프를 보자 기도하듯 두 손을 꼭 모으거나, 발을 구르고, 음악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경쟁적으로 자리싸움을 하는 지지자들의 모습은 마치 연예계 슈퍼스타를 직접 만나는 듯한 설렘이 가득해 보였다. “에어포스 원”(대통령 전용기)이라고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텔레비전 토론에서의 잇따른 말실수와 성추행 사실을 떠벌린 ‘비디오 스캔들’ 등으로 인해 주류 언론에서는 ‘선거는 이미 끝났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지만, 트럼프 유세 현장의 열기는 여전히 뜨거웠다. 유세 현장의 사람들은 트럼프의 여성 비하 발언, 성추행 등이 이들에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노스캐롤라이나주는 최근 미 대통령 선거전에서 잇따라 최대 격전지로 떠오른 곳이다. 지리적으로는 버지니아주 바로 아래 위치해 남부의 ‘북방한계선’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 전통적으로 보수 성향이 강한 공화당 텃밭으로 분류돼 왔다. 하지만 2008년 선거에서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바람을 타고 0.3%포인트 차이로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에게 승리하기도 했다. 그러다 2012년 대선에선 다시 공화당의 밋 롬니 후보에게 패했고, 이번 대선에선 현재까지 클린턴이 트럼프를 오차범위 이내에서 앞서는 등 ‘스윙 스테이트’적 성격이 짙어지고 있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열린 지난달 26일 1차 텔레비전 토론 이후 현재 여론조사에서 클린턴 후보가 2.0%포인트가량 트럼프 후보를 앞서는 등 초접전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민주당 쪽 공세가 전방위적이다. 트럼프의 노스캐롤라이나 유세가 열리기 하루 전인 지난 25일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버스 유세를 펼쳤고, 또 27일 오후에는 윈스턴세일럼에서 미셸 오바마와 클린턴이 첫 공동유세를 펼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클린턴이 지난 7월5일 첫 합동유세를 한 곳도 노스캐롤라이나의 주도인 샬럿이었다. 클린턴의 대통령 당선 이후 트럼프 쪽의 ‘선거 조작’ 시비를 차단하고, 상원을 되찾아 안정적인 집권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선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승리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 트럼프 쪽도 지난 21일에 이어 이날 하루 동안 샬럿에 이어 킨스턴을 찾는 등 노스캐롤라이나 표심 잡기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트럼프는 대선까지 열흘 정도 남긴 시점에서 벌인 이날 유세에서 철저하게 주류 사회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자극했다. 힐러리 클린턴이 연방수사국(FBI)에서 ‘이메일 스캔들’과 관련해 39번이나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 말을 상기시키자, 지지자들은 “감옥에 넣어라”(lock up)를 연호했다. 트럼프가 “주류 언론이 진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며 기자석을 가리키자, 지지자들은 “우~” 하는 야유로 박자를 맞췄다. 미국 기자들은 이미 익숙한 탓인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워싱턴 부패를 일소하겠다(drain the swamp)”고 말하자, 유세장 분위기가 최고조로 치달았다. ‘부패 일소’는 트럼프가 최근 들어 즐겨 사용하는 말이다.
트럼프는 그동안의 단골메뉴들도 적절하게 활용했다. 집권 첫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나프타)을 정지시키고 재협상을 해 일자리를 되찾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멕시코가 100% 비용을 치르는 미국~멕시코 간 장벽을 쌓겠다고 하자, 참석자들은 “장벽을 쌓아라”(Build the wall)며 화답했다. 트럼프는 40여분간의 연설에서 똑같은 주제를 표현만 달리하며 서너번씩 반복했지만, 지지자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트럼프의 유세’는 트럼프와 지지자가 말 그대로 한 몸처럼 움직이는 듯했다.
트럼프 지지자들의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반감은 예상보다 훨씬 견고하고 강했다. 자신을 자영업자라고 밝힌 리니 모런(52)은 “오바마케어(의료보험 개혁)가 실시되면서,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며 분노를 표시했다. 그는 “오바마케어가 실시되기 전에는 4인 가족이 한달에 300달러만 의료보험비로 지출하면 됐지만, 이제 1인당 800달러를 내야 한다. 전기료, 집세 등을 내고 나면 오바마케어에 가입할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직접 기자수첩에 꼼꼼히 액수를 적어주기까지 했다.
그의 말의 진실 여부를 떠나, 킨스턴에서 만난 대부분의 중산층 미국인들이 매년 20~30%씩 의료비가 오르고 있다며 오바마케어의 부담을 호소하는 것은 일치했다. 또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보쉬 등 몇몇 큰 기업이 빠져나가면서 일자리 찾기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호소했다. 트럼프는 정확하게 급소를 짚고 있었던 것이다.
살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기성정치권은 이들의 문제를 풀어주지 못하자, 구체적인 대책도 없이 분노만 자극하는 트럼프조차 이들에겐 ‘고마운 존재’로 다가온 것으로 보인다. 유세장에서 만난 중년 남성인 케빈 다우(48)에게 트럼프 유세 참석 소감을 묻자 그는 “끝내준다. 나는 트럼프를 사랑한다”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트럼프가 상세한 계획을 제시하지는 않은 것 같다’고 하자 그는 “불법 이민을 막고 무역협상을 다시 해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이 대책 아니냐”고 트럼프의 ‘단순 발언’을 되풀이했다.
일부 언론은 트럼프 유세장이 ‘록 콘서트’ 분위기 같다고 했지만, 개방적이긴 해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민주당 경선 때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유세장이 팔팔 뛰는 생선 같은 분위기였고, 클린턴 쪽은 싱싱하지 않은 식재료에 인공 조미료를 많이 첨가한 듯한 분위기였다면, 트럼프 쪽 유세는 그 중간쯤에 위치한 것처럼 느껴졌다.
유세장에서는 흑인, 히스패닉, 아시안계 등 소수인종은 한 명도 마주칠 수 없었다. 모두 다 백인이었다. 다만 유세장 주변에서 트럼프 배지와 티셔츠 등을 파는 상인 10여명이 있었는데, 모두 흑인이었다.
킨스턴/이용인 특파원
yy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