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9년 5월25일 윌리엄 페리(왼쪽에서 두번째) 당시 미국 대북정책조정관이 핵 협상을 위해 북한 평양에 도착해 미소를 짓고 있다. 평양/AP 연합뉴스
윌리엄 페리(89) 전 국방장관은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1994년부터 1997년까지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그는 국방장관 재직시절인 1994년 1차 북핵위기가 발생하자 한때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폭격을 검토하기도 했던 대북 강경파였다. 하지만, 1998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북핵·미사일 문제를 풀기 위한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임명한 뒤 1999년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하는 등 남북한 등과의 폭넓은 접촉을 거쳐 그해 10월 대북 포용을 기조로 한 ‘페리 보고서’를 제출했다.
미 행정부는 ’페리 프로세스’를 바탕으로 북한과의 협상을 시작했으며, 2000년 10월 조명록 특사와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상호 교환 방문을 통해 관계개선을 천명하는 북-미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북-미 수교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페리 프로세스는 북한에 강경했던 조지 부시 행정부의 등장으로 중단됐다.
페리는 원래 스탠퍼드대와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등에서 수학을 전공한 수학박사로 통신 및 군기술 분야의 민간회사 경영진으로 있다가, 1977년 지미 카터 행정부에서 기술담당 국방차관으로 임명됐다. 카터 행정부 때 그는 스텔스비행기 개발을 적극 추진하는 데 앞장서 ‘스텔스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했다. 빌 클린턴 정부에서 국방부 부장관을 거쳐 국방장관을 맡았다.
페리 전 장관은 은퇴 뒤에도 대북 정책뿐 아니라 미 외교정책의 영향력 있는 ‘원로’로, 미 행정부의 대외정책이 강경 쪽으로 흐를 때마다 우려의 목소리를 내며 균형을 잡는 어른 역할을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