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주변은 국내ㆍ외국인들이 몰려 자신들의 투쟁을 알리는 ‘현대판 글로벌 신문고’다. 32년째 반핵운동을 하고 있는 콘셉시온 피시오토(위)와 오큐파이 농성 중인 셔먼 스미스(아래 왼쪽), 파룬궁 시위자들(아래 오른쪽).
한 블록 건너면 ‘오큐파이’
피켓에 구호에 움막살이까지…
관광명소마다 시위명당으로 “시위하면 세상 바뀌나요?”
“아무것도 안하면 바뀌나요?” 백악관 시위는 그 상징성 때문에 미국인뿐 아니라 외국인들이 자기 나라의 민주화 투쟁을 전세계에 알리는 ‘현대판 글로벌 신문고’이기도 하다. 한국의 경우 과거 유신정권 또는 광주민주화운동 때, 재외동포들을 중심으로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세계의 관심과 지원을 호소한 바 있다. 기록을 보면, 1959년에도 한 재외동포가 이승만 정권의 신보안법 제정에 반대해 백악관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지난 3월3일 미주시민네트워크 주최로 한인 40여명이 모여 ‘엠비(MB) 정권 규탄 및 2012 정권교체를 위한 평화시위’가 열렸다. 티베트인 또는 중국에서 금지된 파룬궁 수련자들도 백악관 시위의 단골손님들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이 워싱턴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지난 2월14일에는 티베트인 300여명이 라파예트 공원에 모여 “티베트가 죽어가고 있다”며 티베트 국기를 흔드는 등 ‘반중국’ 시위를 벌였다. 파룬궁 수련자들도 이날 바로 옆 잔디밭에서 명상시위를 벌였다. 파룬궁 수련자들은 중국 지도자가 백악관에 올 때마다 명상시위를 벌인다. 또 매일 낮 11시부터 12시까지 백악관 앞길 건너편에서 백악관을 마주보며 시위를 벌인다. 지난달 24일에도 60~70대 파룬궁 여성 3명이 노란 펼침막을 들고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미국에 온 지 20년이 넘었으나, 영어를 거의 못해 한자로 필담을 해야 했다. 펼침막을 들고 있던 스프링 리(70)는 “1999년 7월20일부터 백악관 앞에서 매일 파룬궁 시위를 벌였다”고 말했다. ‘반중국 시위’냐는 물음에 “우리는 중국을 반대하는 게 아니다. 중국 공산당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의 시위가 13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면, 그 바로 옆에는 32년째 핵반대 시위를 벌이는 콘셉시온 피시오토(67) 할머니의 비닐움막이 있다. 스페인 출신인 이 할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비닐움막에서 핵반대 펼침막을 펼쳐놓고 시위를 벌여 이제는 백악관 앞 풍경의 일부가 된 느낌이다. 관광객들이 수시로 찾아와 이것저것 물어보면, 그게 마치 자신의 직업인 것처럼 핵반대 주장을 펼쳐간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그는 대뜸 비둘기 그림과 ‘평화’라는 한글이 적힌 큼지막한 돌 하나를 가리켰다. “얼마 전까진 한국인이 오면, 이 돌을 들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이젠 이 돌을 들 힘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기사가 실린 1991년의 <동아일보> 기사를 건네준다. 1962년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스페인 영사관 등에서 일하다 1979년 반전 활동가인 윌리엄 토머스(2009년 사망), 노먼 메이어 등과 만나면서 본격적인 반전·반핵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애초 개인적인 일로 백악관 앞에서 자신의 사연을 호소하는 1인시위를 벌이다 당시 백악관 앞에서 또다른 1인시위를 벌이던 반핵 활동가인 메이어를 만나 그의 영향을 받으면서 1981년부터 백악관 앞에 입간판을 만들고 1인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의 입간판에는 히로시마 원폭 및 체르노빌 원전 피해자들의 사진이 붙어 있다. 가끔 다른 곳에서 잠을 자기도 하지만 대개 움막 안에 얇은 이불 하나를 깔고 자고, 낮에는 움막 앞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핵무기의 위험성을 이야기한다. ‘왜 이렇게 오랜 세월 핵반대 시위를 하느냐’는 물음에 그는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는 이 일에 내 생을 희생시키기로 30년 전 결심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했다. ‘현 대통령은 오바마이고, 오바마는 부시와는 다르지 않으냐’고 하자, “‘테러리스트’ 부시에 비해 조금 낫긴 하지만, 그 역시 핵폐기를 않고 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라며 실망감을 숨기지 않았다. 북핵 문제를 두고서도 그는 서울 핵정상회의를 언급하며 “그때 오바마가 비무장지대(DMZ)를 갈 게 아니라, 그 회의에 북한을 초청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곳에서 반평생을 지냈다. 나이 60이 넘은 정도인데, 너무 오랜 노숙생활 탓인지 검게 그을린 얼굴에 이가 다 빠져 팔순 노인처럼 보였다. 작은 체구는 바스러질 것만 같고, 이는 윗니 하나, 아랫니 두개가 흔들리듯 남아 있다. 그의 말을 듣는데, 혓바닥에 밀려 그 남은 이마저 빠질까 조마조마했다. ‘이곳에 움막을 설치하는 것을 허락받았느냐’고 하자, 그는 “초기에는 여러 차례 경찰에 체포됐고 맞기도 했지만, 지금은 공식 허가를 받은 상태”라며 30년 전 이야기를 어제 일처럼 늘어놓았다. 피시오토는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시위를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백악관 앞은 온종일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아 매일 똑같은 풍경이 반복된다. 관광객은 밤에도 이어져, ‘자전거 투어 관광객’들이 헬멧을 쓴 채 자전거 안장에 걸터앉은 채로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백악관 앞은 이날 밤 10시에도 인적이 끊어지지 않았다.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는 백악관 뒤쪽 도로는 24시간 개방돼 있기 때문이다. 백악관에서 걸어서 5분, 한 블록만 지나면 ‘오큐파이(점령·점거) 디시’ 시위대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는 맥퍼슨 광장이 나온다. 지난해 10월 이곳에서 워싱턴 ‘오큐파이’들의 첫 시위가 시작된 이래 천막농성이 시작됐고, 지난 2월 경찰의 강제철거로 많은 수가 떠났지만, 아직도 이곳을 떠나지 않은 이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다만 지난해 10월의 신선한 열기는 많이 가라앉은 듯 꺼져가는 낡은 천막 앞에 히피풍 젊은이들이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곳에서 행정 일을 맡고 있는 대학생 카일 슐로젝(22)은 “우린 아직도 배가 고프다”며 “우리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결의를 다졌다. 이번 대선에 오바마를 지지할 것이냐는 물음에는 “노”라며, “오바마가 롬니보다 낫긴 하겠지만, 큰 차이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후보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이 물음에 대한 일부 점령시위자들의 답변이었다. 주변을 서성이던 셔먼 스미스(26·수화 통역자)는 매달 2500달러 정도를 번다. 이 중 원룸 아파트의 집세 850달러를 빼면, 1650달러만 남는다고 자신의 재정 상황을 털어놓았다. 그는 “매번 허덕인다.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바뀌었고, 이젠 그나마도 점점 벌이가 줄어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점령시위로 세상이 바뀐다고 믿느냐’고 묻자, “그러면 아무것도 않고 있으면 세상이 바뀌느냐”며 “자본주의의 탐욕을 언젠가 사람들이 무시하고도 살아갈 수 있는 날을 위해 오늘도 이곳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고 답했다. 워싱턴/글·사진 권태호 특파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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