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게이트 사임’ 대배심 증언 36년만에 공개했지만…
“녹음테이프 삭제는 사고”…자가당착·책임회피 일관
“녹음테이프 삭제는 사고”…자가당착·책임회피 일관
“정치판에서 상당히 거친 전술들이 쓰이는데, 정말로 개탄스럽다” “내가 뭔가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엔, 그것이 질문을 피해가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걸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리처드 닉슨(1913~1994) 전 미국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뒤 대배심의 조사를 받을 때 분노와 냉소, 책임 회피로 일관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미 국립문서보관소와 닉슨 도서관은 10일 닉슨이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한 대배심 증언들을 36년 만에 인터넷 누리집을 통해 일반에 공개했다. 워싱턴 지방법원이 지난 7월 미국 역사학자들의 기록 공개 청원을 받아들인 데 따른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1972년 6월 닉슨(공화당)의 재선 캠프가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던 민주당 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들켜, 탄핵 위기에 몰린 닉슨이 스스로 물러난 사건이다.
이번에 공개된 기록들은 닉슨이 사임한 지 10개월 뒤인 1975년 6월23~24일 11시간 동안 캘리포니아 자택에서 진행된 대배심 증언의 녹취록과 재임 당시 백악관 참모들과의 대화 내용이 담긴 음성 테이프 등 워터게이트 관련 자료들이 망라돼 있다. 이 기록들은 그동안 국가 기밀 보호를 이유로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닉슨 도서관은 닉슨과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전화 통화록 등 3000쪽 분량의 기록을 우선 공개한 데 이어, 국내 정책 수석 보좌관이었던 켄 콜이 보관해온 4만5000쪽 분량의 기록물과 대통령 집무실 대화가 녹음된 45분 분량의 음성 테이프도 추가 공개할 예정이다.
그러나 가장 관심을 끄는 ‘음성테이프 삭제’ 내용은 이번에도 드러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도청 시도가 폭로된 직후 닉슨은 해리 로빈슨 홀더만 국내 정책 수석 보좌관과 사건 은폐 방안을 논의했다. 당시 특별검사는 닉슨과 홀더만의 대화가 자동으로 녹음된 백악관 집무실 녹음 테이프 제출을 요구했고, 결국 이 테이프는 18분30초 가량이 삭제된 채 제출됐다.
닉슨은 대배심 증언에서 “녹음 테이프 삭제는 단순한 사고였으며, 나도 그 사실을 알고 격노했다”고 주장했으나, 지워진 내용에 대해선 끝내 입을 다물었다. 그는 대배심원들에게 “알렉산더 헤이그(비서실장)에게 ‘이 빌어먹을 사태가 왜 일어났는지 알아보자’고 말했다”고 했다가 “미안하다. 비속한 말을 쓸 생각은 없었다. 당신들은 이 테이프에서 이미 많은 정보들을 얻었다”고 말을 돌리기도 했다.
닉슨은 또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의 파일들을 체크하라고 지시한 기억이 결코 없다. 기억나는 건 맥거번의 (정치자금) 기부자들을 알아보라고 했을 뿐”이라며 자가당착에 가까운 주장을 했다.
정보공개 청원을 주도한 스탠리 커틀러 위스콘신대 명예교수는 10일 <뉴욕 타임스>에 “닉슨의 목소리에선, 어색한 유머에서부터 자기 연민까지 거장다운 풍모가 느껴진다”고 꼬집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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