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류재훈 특파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5일 체코 프라하에서 ‘핵무기 없는 세계’에 대한 비전을 밝히는 역사적 연설을 했다. 북한의 로켓 발사에 대해 단호한 국제적 대응을 강조한 지 몇시간 뒤였다.
‘핵무기 없는 세상’에 대한 오바마 대통령의 공언은 핵무기 선제 사용 의지를 밝혔던 전임 부시 행정부의 핵 정책과 분명한 선을 그은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내년에 발표할 ‘핵 태세 보고서’(NPR)에, 이런 장기적 비전과 함께 핵 억지전략을 강조한 단기적 정책 과제들을 담을 것으로 예상된다. 프라하 연설은 내년 5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평가회의 등을 염두에 두고 핵 정책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리더십을 천명한 것이다.
지난달 30일 미국 싱크탱크인 ‘외교협회(CFR)’가 발표한 ‘미국의 핵무기 정책’ 보고서는 오바마 행정부 핵 정책의 예고편이다. 보고서를 작성한 태스크포스팀의 공동의장은 윌리엄 페리 전 대북정책조정관과 오바마 행정부 외교안보팀의 막후 실세로 알려진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맡았다. 특히 오바마 행정부에서 비확산 담당 ‘차르’ 역할을 맡고 있는 게리 시모어 백악관 대량파괴무기(WMD) 정책조정관이 옵저버로 참가해 보고서의 무게를 더했다.
보고서는 핵 확산 방지를 위해 상업적 핵기술 획득의 전제조건으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강화된 안전조처협정인 추가의정서에 서명하도록 할 것과 핵확산금지조약 탈퇴국에 대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차원의 특별사찰을 추진할 것 등을 권고했다.
보고서에서 북한 핵문제가 다뤄지긴 했지만, 중요도는 크게 떨어진다. 북핵 프로그램 폐기와 검증 과정에서 오바마 행정부가 상당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지적 외에 대북정책에 대한 특별한 건의도 눈에 띄지 않는다. 미국 내에서 ‘절반의 성공’인 북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에 대해, 직접적인 위협 방지보다는 비확산에 주력해야 한다는 인식이 늘고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오바마 대통령 취임 100일을 기념해 2차 핵실험 등 “자위적 조처”로 위협할 수밖에 없는 북한의 행동을 이해하기보다는 실망감을 표시하는 오바마 행정부의 인사들이 늘고 있다. 북한과 직접외교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당장은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북핵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 직접대화 방침까지 밝혔던 오바마 행정부는 이제는 6자회담 재개 촉구를 되뇌이며 도발에는 제재로 맞서겠다는 태도로 바뀌었다. 핵무기의 전면 폐기를 목표로 내세운 오바마 행정부와 핵무장을 위협하는 북한의 엇박자 속에 한반도에서는 한동안 긴장이 고조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류재훈 특파원 hoon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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