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인종화합 상징 4중주 눈길
200만명 인파중 30% 흑인
워싱턴 하루종일 교통 몸살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린 20일, 수도 워싱턴엔 하루 종일 영하의 추위가 맴돌았다. 그러나, 흑백차별의 아픈 역사를 뛰어넘는 현장에 동참하려고 취임식에 몰려든 200여만 인파들의 열기와 관심, 환호는 뜨거웠다. 이날 취임식에 몰린 인파는 1965년 린든 존슨 대통령 취임식 때의 120만명을 크게 웃도는 사상 최대 규모였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미국이 이제 하나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취임선서를 마친 오바마 대통령이 “오늘 우리는 두려움을 넘어 희망, 갈등과 분열을 넘어 단결을 선택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 모였다”고 연설할 때 가장 큰 박수가 쏟아졌다. 오바마 대통령이 “오늘부터 우리 자신을 곧추 세우고 먼지를 털고 일어나 미국을 재건하는 과업을 시작하자”고 호소할 땐 사람들은 추위에 움츠렸던 손을 치켜들며 열광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멀리 있는 취임 단상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곳곳에 설치된 점보트론 화면을 보고도 그들은 “오바마”을 연창하며, 불확실성과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미국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되새겼다.

오바마 대통령이 빨간색 넥타이, 물러나는 부시 대통령이 파란색 넥타이를 매고 나와, 서로 상대방 당을 상징하는 넥타이를 맨 채 초당적 단합을 보여준 것도 이날 분위기를 상징했다. 축하공연에서 요요마(첼로-아시아계)와 이츠하크 펄만(바이올린-유대계), 앤서니 맥길(클라리넷-흑인), 가브리엘라 몬테로(피아노-히스패닉) 등 인종적 다양성을 상징하는 세계적 연주자 4명이 함께 연주한 것도 이날 취임식의 의미를 더했다.

청중 가운데는 특히 흑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흑인들은 미국 전체 인구의 14%지만, 이날 인파 가운데는 거의 1/3을 차지했다. 앨라바마 플로렌스에서 왔다는 알타 모로(61) 할머니는 “꿈이 실현됐다”며 “하느님이 내려보낸 오바마와 함께 미국은 이제 하나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흑백분리 시절 버스 뒷좌석에 박혀 여행했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옆에 서있던 흑인 교사 발레리 피터슨(50)도 “방황하는 흑인 학생들에게 오바마는 희망이자 역할 모델”이라며 “그들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꿈을 가질 수 있다고 얘기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필라델피아에서 온 은퇴교사 제임스 존스(73)는 “45년 전 버스를 타고 워싱턴에 와서 ‘나에게 꿈이 있다’는 킹 목사의 연설을 들었다”며 “오늘 워싱턴기념탑을 보면서 그때의 전율을 다시 느낀다”고 말했다.

이날 취임식이 열린 의사당과 내셔널몰 주변은 동틀 무렵부터 좋은 자리를 잡으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행사장 인근 교통이 전면 차단되고, 버지니아에서 워싱턴으로 들어오는 다리들이 통제되면서 지하철은 하루 종일 몸살을 겪었다. 겨울바람을 뚫고 10여㎞를 걸어 포토맥강 다리를 걸어서 건너는 이들도 많았다.

회사원 티모시 존스는 “만원 지하철 안은 미국의 축소판인 인종의 용광로가 됐다”고 말했다. 메릴랜드주 애나폴리스에 사는 건축가 크레이그 스나이더는 “워싱턴으로 들어오는 불편을 줄이려고 15살 딸 앨리사와 워싱턴 사무실에서 침낭을 깔고 잠을 잤다”며 딸과 함께 역사의 현장에 참여한 데 대해 자랑스러워 했다.

취임식이 끝난 뒤 지하철 역에 들어가기까지 2~3시간 줄을 서야 했지만, 사람들은 “오바마”를 연호하며 단합을 과시했고, 불평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날 함께 새로운 미국의 희망을 느낀 이들의 동질감은 모든 불편을 감수할 수 있는 힘이 됐다.

워싱턴/류재훈 특파원 hooni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