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북쪽으로 800㎞ 떨어진 플레세츠크 기지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시험이 진행되고 있다. AP 연합뉴스
미국이 러시아의 협정 이행 중단을 이유로 전략핵무기 정보 제공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미-러 사이에 남은 유일하면서도 중요한 핵군축 조약인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뉴스타트)이 더욱 심각한 존폐의 기로에 섰다.
백악관·국무부·국방부 등 미국 행정부 관계자들은 28일 기지별로 배치한 폭격기, 미사일, 핵탄두 수를 6개월마다 상대국에 제공해야 한다는 뉴스타트 규정을 이행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러시아가 뉴스타트 이행을 중단한 것에 대한 첫 대응 조처”라고 설명했다.
미국 행정부 관계자들은 보니 젠킨스 국무부 군비통제·국제안보 차관이 전날 세르게이 럅코프 러시아 국방부 차관에게 이런 정보를 계속 교환하자고 제안했지만 긍정적 반응이 없어 미국도 전략핵무기 정보 제공을 중단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러시아가 조약을 준수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조처라고 설명했다. 또 미국 행정부 고위 관계자는 “이런 자료 제공은 미국의 핵전력에 대한 최상의 정보 업데이트”라며 “러시아 관계자들은 이런 정보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번 조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5일 이웃한 형제국 벨라루스에 전술 핵무기를 배치하겠다고 밝힌 것에 대한 대응 성격도 있어 보인다.
실전 배치 전략핵탄두를 각각 1550기로 제한하는 게 뼈대인 뉴스타트는 협정 이행 여부 검증을 위한 상호 사찰과 정보 제공을 규정하고 있다. 2010년에 조인된 이 협정은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21년 1월에 5년 연장이 합의됐다. 그러나 상호 사찰은 2020년 3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양국 합의에 따라 중단됐다. 미국은 지난해 상호 사찰 재개와 이를 논의하기 위한 회동을 제안했으나 우크라이나 전쟁을 치르는 러시아가 동의하지 않았다.
푸틴 대통령은 이런 상태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개전 1돌을 맞아 우크라이나를 전격 방문한 이튿날인 지난달 22일 국정연설에서 뉴스타트 이행 중단을 선언했다. 다만 러시아는 조약 폐기는 아니라고 밝혔다. 러시아는 사찰은 허용하지 않아도 실전 배치 전략핵탄두 수를 협정에 맞게 유지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도 기존처럼 미국에 통보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은 러시아의 태도에 따라 협정 이행 중단 폭을 넓힐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 차원에서 사실상 매일 러시아에 통보하는 전략미사일, 폭격기, 잠수함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 제공 중단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대릴 킴벌 미국 군축협회 사무총장은 이번 정보 제공 중단 발표에 대해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미국이 사용할 수 있는 지렛대를 없애고 양국의 조약 준수와 관련한 상황을 더욱 불투명하게 만들 것”이라고 <월스트리트 저널>에 말했다. 러시아가 이에 맞대응하면 악순환이 이어질 것이라는 얘기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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