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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미국·중남미

‘미 2인자’ 무릎 꿇린 공화 초강경파, 미국까지 마비시킬까

등록 2023-01-17 08:00수정 2023-01-17 09:05

케빈 매카시 미국 하원의장이 12일 의사당에서 기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워싱턴/로이턴 연합뉴스
케빈 매카시 미국 하원의장이 12일 의사당에서 기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워싱턴/로이턴 연합뉴스

2019년 1월3일, 미국 하원의장 취임 선서를 하려던 낸시 펠로시 의장이 “올라오고 싶은 어린이들은 여기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어린이들은 신나는 표정으로 의장석 주위에 모였다. 초선 의원들은 아이들까지 데려와 부모의 취임 선서를 지켜보는 전통에 따라 온 아이들이었다. 펠로시 의장은 “미국의 모든 어린이들을 위해 개회를 선언한다”며 명장면을 연출했다.

2023년 1월3일, 부모를 따라 하원에 온 어린이들에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공화당의 내분으로 케빈 매카시 의장의 선출이 지연되면서, 어린이들은 지겨운 표정으로 어른들의 실랑이와 거친 말을 보고 들어야 했다. 곯아떨어진 아이들도 보였다. 민주당의 살루드 카바할 의원은 물품 보관실 소파에서 젖먹이들을 안은 초선 의원들 모습을 트위터에 올리면서 “얘들이 몇살이 돼야 하원의장이 뽑힐지 모르겠다”고 했다.

“벌거벗은 임금님”

매카시 의장은 나흘에 걸친 15차례 투표 끝에 7일 새벽에야 의장석에 앉을 수 있었다. 164년 만에 가장 긴 선출 절차였다. 미국 정치가 남북전쟁 전 다툼이 극렬하던 때와 비슷한 모습을 노출한 것이다. 매카시 의장은 자신을 반대하는 공화당 의원들을 끈질기게 설득했지만 최종적으로 얻은 표는 216표에 그쳤다. 하원 435석의 반도 확보하지 못했다. 그나마 절대로 지지할 수 없다며 버티던 6명이 기권을 선언해 유효 투표수와 과반 기준을 줄이는 곡예를 했기에 15차에서 투표가 끝났다. 11차까지는 소속 의원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하킴 제프리스 민주당 원내대표에게 내내 뒤지기도 했다.

매카시 의장은 미국의 사실상 2인자가 되는 필생의 꿈을 이뤘지만 공화당 초강경파 모임 ‘프리덤 코커스’에 표를 구걸해야 했고, 너무 많이 양보했다. 하원은 2년짜리 새 회기 시작 때마다 규칙을 새로 정하는데, 그는 규칙 등에 초강경파의 요구를 20가지 이상 수용했다. 핵심은 △법률안 수정 권한이 있는 규칙위원회 등에 초강경파의 주요 상임위 배치 △의원 1명도 의장 해임안 발의 가능 △정부 지출 제한과 증세 차단 노력 △의원 총임기 제한(상원 12년, 하원 6년) 법안 투표 실시 등이다.

애초 자신에게 표를 줄 수 없다는 20명의 요구 사항 중 일부만을 받아들인 매카시 의장은 투표 횟수가 거듭될수록 뒤로 물러섰다. 전에는 공화당 의원 과반이 발의해야 하원의장 해임안이 성립했는데, 협상 과정에서 이를 5명으로 줄이더니 마지막에는 초강경파 요구대로 1명으로까지 축소하며 백기를 들었다. 처음엔 양말, 이어 겉옷, 나중엔 속옷까지 내준 셈이다. 피트 세션스 공화당 하원의원은 <엔피아르>(NPR) 인터뷰에서 그를 “벌거벗은 임금님”이라고 했다.

매카시 의장이 초강경파에게 주눅 든 상황은 2015년 존 베이너 하원의장과 자신이 프리덤 코커스에 크게 덴 경험과도 이어져 있다. 당시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 유화적이라는 이유로 초강경파가 제출한 해임안 등에 시달리다 물러난 베이너 전 의장의 후임으로 유력시되던 이는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이던 매카시 의장이었다. 그러나 매카시 의장과 협상하던 프리덤 코커스는 그가 베이너 전 의장과 별로 다르지 않고, 민주당 대권 주자로 꼽히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도와주는 말실수까지 했다며 물고 늘어졌다. 이에 의장직 도전을 철회한 매카시 의장은 수년간 재도전을 준비해 뜻을 이룬 셈이지만 성공 과정은 끝까지 굴욕으로 점철됐다. 정치 전문가들은 계속 끌려다니며 초강경파 손에 칼을 쥐여준 그가 임기를 채울 수 있겠냐는 의구심마저 제기한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진짜 승자는 트럼프?

매카시 의장의 속을 태운 초강경파 20명 중 프리덤 코커스 소속 19명을 두고 ‘19명의 탈레반’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그들의 배후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목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표결 둘째 날 소셜미디어로 “케빈에게 투표하라”고 촉구했지만 이 20명은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넷째 날인 6일 밤 상황을 보면 그가 막후 해결사로 나섰음이 드러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측근이면서 매카시 의장의 측근이기도 한 마저리 테일러 그린 의원을 통해 14차 투표 때도 매카시 의장을 반대한 의원 등에게 전화를 돌렸다. <뉴욕 타임스>는 14차까지도 그를 반대한 의원이 전화를 받고 15차에서 기권으로 돌아선 사례도 확인됐다고 했다. 매카시 의장은 선출 직후 “트럼프 대통령에게 특별히 감사한다”며 “누구도 그의 영향력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12일에는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하원의 탄핵 결정 말소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원의장 체면에 어울리지 않게 공개적 충성 맹세를 이어가는 것이다.

매카시 의장이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바짝 엎드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1년 1월6일 의사당 난동 사태에 “(트럼프) 대통령은 폭도들의 의사당 공격에 책임이 있다”더니 그달 말 마러라고 리조트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찾아가 머리를 조아렸다. 의사당 난동을 이유로 한 하원의 트럼프 전 대통령 탄핵 투표에서는 반대표를 던졌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공화당이 잘하면 하원에서 30~40석까지 앞설 수 있다던 중간선거에서 불과 ‘9석 차이’로 승리하자 책임론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가 지원한 후보들의 자질 논란과 극우적 언행이 표를 깎아먹었다는 평가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당과의 근소한 의석 차이가 단결된 소수 초강경파의 위력을 키워줬다. 저조한 선거 결과가 역설적으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셈이다.

프리덤 코커스는 2016년 대선 때 트럼프 전 대통령을 적극 밀고, 2020년 그의 패배 뒤에는 부정선거 주장을 펴며 대선 불복을 주도한 그룹이다. 2024년 대권 재도전을 선언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다시 이들 등에 올라타는 중이다.

먹구름 몰려오는 연방정부

프리덤 코커스는 강한 연방정부를 죄악시하며 그 규모와 권한 축소에 초점을 맞춘다. 세금과 복지 확대를 가장 혐오한다. 전반적으로 공화당 쪽은 연방정부 비대화에 회의적이지만 특히 프리덤 코커스는 근본주의적이고 전투적인 태도가 뚜렷하다. 공화당 하원의원 222명 중 프리덤 코커스 구성원은 매카시 의장을 끝까지 괴롭힌 19명을 비롯해 40여명뿐이지만 하원 규칙 등을 통해 ‘무기’를 확보했기 때문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하원의장 선출을 둘러싼 공화당 내분 사태의 에너지는 이제 연방정부에 대한 투쟁으로 이동하고 있다. 연방정부는 부채 한도 증액과 증세에 부정적인 공화당, 이에 맞서는 민주당의 대립 속에 셧다운(부분 업무 정지)과 디폴트(채무 불이행) 위기를 겪고는 했다.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13일 매카시 의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연방정부가 19일에 부채 한도에 도달할 예정이지만 당분간은 회계 조정 등 비상 조처로 버틸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31조4천억달러(약 3경8229조2천억원)인 한도를 올리지 않으면 6월 초 정도에 현금과 비상 조처가 바닥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이 국가 부도에 이른다는 말이다. 매카시 의장은 15일 <폭스 뉴스> 인터뷰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과 부채 한도 인상을 직접 논의할 의향이 있다면서 지출 삭감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백악관은 타협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공화당 초강경파가 ‘벼랑 끝 전술’을 펴기에 알맞은 환경이 갖춰지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미국이 실제로 디폴트에 빠질 위험성이 작지 않다는 관측이 나온다. 하원의장 선출 과정에서 보듯 초강경파는 혼란이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초강경파와의 불화 끝에 중도에 의사봉을 내려놓은 베이너 전 의장은 프리덤 코커스를 “완전한 혼란”을 추구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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