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21일 피임권 보장 법안 표결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미국 하원이 연방대법원의 피임권에 대한 기존 판례 파기 가능성에 대비해 피임 수단에 대한 접근을 보장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하원은 21일 전국적 차원에서 피임약 등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하는 법안을 찬성 228표 대 반대 195표로 가결했다.
이번 표결은 하원이 동성 결혼과 타인종 간 결혼을 법률로 인정하고 보호하는 내용의 결혼존중법안을 찬성 267표 대 반대 157표로 통과시킨 지 이틀 만에 이뤄졌다. 피임권을 인정하는 대법원 판례가 존재하는 가운데 이뤄진 이번 표결도 보수 성향 대법관들이 압도(보수 6, 진보 3)하는 대법원이 기존 판례를 깰 가능성에 대비한 ‘선제적 입법’이다. 미국 사법부와 입법부 간 전례가 드문 대립이 잇따라 표출되는 셈이기도 하다.
앞서 대법원이 임신중지권을 헌법적 권리로 인정한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례를 지난달 24일 폐기하자, 사생활의 권리를 헌법적 권리로 인정한 다른 판례들도 깨질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급속히 퍼졌다. 특히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이 동성혼과 피임권에 대한 판례도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판결문을 통해 밝힌 게 위기감을 증폭시켰다.
미국에서 피임권은 결혼한 부부의 피임 도구에 대한 접근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1965년 ‘그리스월드 대 코네티컷’ 판례 등에 의해 보장돼왔다. 하지만 민주당 등은 임신중지권에 대한 1973년 판례를 폐기한 대법원이 피임권에 대한 판례조차 건드릴 수 있다고 본다. 피임권 판례가 폐기된다면 공화당이 이끄는 일부 주정부들이 사후피임약 판매를 제한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미국 언론들은 이번에 찬성표를 던진 공화당 의원은 8명뿐인 점을 거론하며 상원에서도 비슷한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인다고 지적했다. 하원에서 동성혼 보호 법안에 공화당 의원 47명이 찬성한 것에 비하면 공화당 쪽이 피임권 보장에는 훨씬 미온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공화당 의원들이 피임권을 임신중지권과 비슷한 맥락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상원은 민주·공화당이 의석을 50석씩 반분하고 있는데, 필리버스터를 생략하고 표결로 나아가려면 60명의 동의가 필요하다. 즉 민주당이 발의한 법안을 자당 의원 전원이 찬성하는 것을 전제로 공화당 의원 10명을 더 끌어들여야 하는 것이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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