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바르샤바의 한 운동장에서 난민 신청 절차를 밟는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을 만나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소녀를 안아주고 있다. 바르샤바/AFP 연합뉴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유럽 최전선인 폴란드를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권좌에 머물러선 안 된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두고 “살인적 독재자” 등 도덕적 비난을 쏟아낸 데 이어 푸틴 대통령의 권력 유지 여부까지 언급하며 매우 공세적인 태도를 나타낸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26일(현지시각) 폴란드 바르샤바의 왕궁에서 한 연설 말미에 푸틴 대통령을 가리키며 “제발 이 사람은 권좌에 머물러선 안 된다”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포함한 청중 1천여명 앞에서 한 연설에서 푸틴 대통령이 “수십년간의 전쟁” 위협을 가하고 있다며 “이 전투에서는 며칠, 몇달 안에 승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의 전신인 소련이 군사력 등을 동원해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의 민주화운동을 억압한 사례를 거론하며 러시아에 맞서 긴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전략적 실패”로 규정하면서 “나토 영토를 1인치라도 넘는다는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푸틴 대통령에게 경고했다.
이 연설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참석에 이어 폴란드 방문까지 나흘 간의 유럽 방문을 마무리하는 차원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전날에는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푸틴 대통령을 또다시 “전범”이라고 부르며 “(이런 판단은) 법률적 정의에도 부합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앞서 미국 국무부는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군의 전쟁범죄를 확인했다고 밝힌 바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26일 폴란드로 대피한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만난 직후에는 푸틴 대통령을 “도살자”라고 불렀다.
특히 “권좌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앞서 나온 발언들을 뛰어넘는 차원으로, 이제까지 바이든 대통령이 내놓은 표현들 중 수위가 가장 높다. 미국이 러시아의 정권 교체를 추구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백악관은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이 러시아 정권 교체에 대한 의지를 나타낸 것 아니냐는 관측에 서둘러 해명에 나섰다. 백악관 관계자는 “러시아에서 푸틴의 권력이나 정권 교체를 논한 게 아니다”라며, “푸틴이 이웃 국가들이나 그 지역에 권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푸틴 대통령의 폭력적 대외 정책을 비판하는 것일 뿐, 미국이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려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 발언은 연설 원고에는 없는 내용인 것으로 전해졌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에 “그건 바이든이 결정할 게 아니다.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인들이 선출한다”며 “미국 대통령이 그런 발언을 하는 것은 물론 부적절하다”고 반응했다. 그는 이 발언이 미-러 관계에 “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다. 이날 바이든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만날 때 러시아군은 폴란드 국경에서 70㎞밖에 떨어지지 않은 우크라이나 서부 도시 르비우에 여러 발의 로켓 공격을 가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두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는 “우리는 제5조를 신성한 약속으로 받아들인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모든 나토 회원국들 연결시키는 신성한 약속”이라며 동유럽 나토 회원국들에 대한 안보 공약을 재확인했다. 집단 안보 조항으로 불리는 나토 헌장 제5조는 특정 회원국에 대한 공격에 회원국 전체가 대응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두다 대통령에게 “당신들의 자유는 우리의 자유다”라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바르샤바를 방문한 우크라이나의 드미트로 쿨레바 외무장관과 올렉시 레즈니코프 국방장관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이 참석하는 양국 ‘2+2’ 회담에 사전 예고 없이 참석한 것이다. 백악관은 바이든 대통령이 “벨기에에서 열린 (나토 등의) 정상회의를 비롯해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려고 세계를 결집시키는 미국의 노력에 대해 설명했다”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바르샤바의 운동장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난민들의 손을 잡고 포옹도 하며 격려했다. 난민 소녀를 안아주며 자신의 손녀들 생각이 난다고도 했다. 난민 여성들과 어린이들은 러시아군에 맞서려고 고국에 남은 남편과 아버지 얘기도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 만남을 마치며 “난 항상 인간 정신의 깊이와 힘에 놀란다”고 말했다.
한편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을 1989년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 항쟁에 빗댔다고 <아에프페>(AFP) 통신이 보도했다. 그는 25일 우크라이나와 가까운 폴란드 영토에 배치된 미군 장병들을 만난 자리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이 기개를 보여주고 있다면서 “30살 여성이 탱크 앞에서 소총을 들고 섰다”는 사례를 들었다. 이어 “난 천안문광장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건 천안문광장이다”라고 말했다. 천안문광장에서 탱크를 맨몸으로 막아 서 ‘탱크맨’으로 불린 중국인을 떠올린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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