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비급 권투 세계챔피언 출신인 비탈리 클리츠코 키이우 시장이 6일 검문소를 방문하고 있다. 키이우/AP 연합뉴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우크라이나 망명정부 설립 가능성에 대비해 지원책을 은밀히 준비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논의가 초기 단계이고 확정된 내용은 없지만,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함락할 경우에 대비해 장기 항전을 준비하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와 <시엔엔>(CNN)은 6일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 망명정부가 세워지면 이를 어떻게 도울지 검토하고 있다고 양쪽 관리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키이우가 함락되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등 우크라이나 정부 수뇌부가 대피해 게릴라전 방식을 통한 장기 항전을 지휘해야 할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현재 우크라이나군이 강렬한 저항으로 러시아군의 진격을 상당히 저지하고는 있으나 병력과 화력의 열세가 뚜렷하기에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미국 국방부 고위 관리는 국경지대에 집결했던 러시아군의 95%가 이날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에 투입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익명을 요구한 미국 행정부 관계자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폴란드에서 망명정부를 이끄는 것을 포함해 “모든 가능성에 대비해 비상 계획을 짜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 관리들은 키이우 사수를 외치는 젤렌스키 대통령 등 우크라이나 정부와 이런 계획을 논의하지는 않고 있다고 밝혔다. 앞서 개전 초기에 미국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키이우 탈출을 권유했으나 그가 거부했다는 보도가 나온 바 있다. 미국과 유럽 쪽에서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키이우가 함락당하는 상황에서도 탈출을 거부하거나 탈출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면 다른 우크라이나 각료 일부를 대피시켜 망명정부를 꾸리게 하는 안도 거론된다.
미국과 유럽 관리들은 망명정부의 거처로 우크라이나 서부 도시로 폴란드와 가까운 리비우도 꼽힌다고 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전역을 점령하려 할 경우 이웃나라 폴란드로 가는 게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각지에서 게릴라전이 전개될 때 미국 등이 지원한 무기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 영토 전체가 러시아군 수중에 들어가더라도 망명정부를 통한 저항이 가능하다고 보는 데는 러시아에 대한 국제적 반발이 크다는 점이 있다. 망명정부를 지원하고 러시아를 제재한다는 국제적 동력이 계속 살아 있을 것으로 전망하는 것이다. 2일 유엔 긴급특별총회에서는 러시아를 규탄하고 철군을 요구하는 결의가 압도적 지지로 통과됐다.
우크라이나군이 강한 항전 의지를 보이면서 비정규전에도 대비해왔다는 점도 꼽힌다. 한 서구 관리는 “(우크라이나인들은) 중앙화된 지휘부나 수도로부터의 통제가 없더라도 저항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른 고위 정보 관리는 2차대전 때 경험을 거론하며 “우크라이나인들은 맹렬한 전사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의 전부를 점령해도 길게는 몇년에 걸쳐 무장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워싱턴 포스트>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고문인 미하일로 포돌략은 이런 ‘비상계획’을 언급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우크라이나는 키이우 공격을 준비하는 러시아에 맞서 단호하게 방어를 준비하고 있다는 점만 얘기하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우리는 전쟁에서 이겨야 하며,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했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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