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수십년간 볼 수 없었던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부터 불거진 노동력 부족 현상이 ‘대퇴직(Great Retirement) 시대’라는 신조어까지 유행시키고 있다. 코로나 위기가 최악을 벗어나면서 소비욕은 되살아났지만 일손 부족으로 영업시간 축소, 임금 인상, 고용 관행 변화 등 경제와 노동시장에서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미국 노동자들이 가져가는 상대적 몫이 지난 수십년 동안 많이 줄고, 특히 저임금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사실상 정체(하위 10%는 1979년부터 40년간 6.5% 증가)해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변화는 더욱 낯설다. 이에 더해 경제의 세계화와 정보기술(IT)의 확산이 겹치면서 노동 쪽 협상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노동시장의 갑작스러운 ‘이상 동향’은 자본주의의 선봉 미국에 어떤 근본적 변화가 오는 것 아니냐는 전망마저 낳고 있다.
미국 노동부 집계를 보면, 지난해 자발적으로 일을 그만둔 노동자는 4740만명에 이른다. 코로나 사태 전인 2019년에 그 수가 4210만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2년 만에 자발적 퇴직자가 530만명이나 늘어난 것이다.
실업의 공포에 떨었던 2020년을 떠올리면 믿기 어려운 반전이다. 코로나 사태가 본격화된 직후인 2020년 4월 실업률은 14.7%(올해 1월 4.0%)에 달해 한달 만에 10.3%포인트나 뛰어올라 1948년 통계 작성 이래 최악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그달에만 2000만명이 일자리에서 쫓겨났다. 비자발적 실직의 ‘쓰나미’에서 헤어나는 것은 아득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언젠가 코로나 사태가 고비를 넘기고 경제가 다시 활성화되면 노동자들이 대거 일자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4월부터 수수께끼 같은 상황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예상과 달리 노동자들이 일터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자 미국 노동시장이 ‘가본 적 없는 길’로 접어들었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노동에 대한 수요가 전례 없는 속도로 치솟고, 기업들의 적극적 구인 노력에도 많은 이들이 일을 그만두는 현상이 결합되며 “우리가 기억하는 한 가장 특이한” 노동시장이 형성됐다고 규정했다.
새로운 현상을 두고 정부, 학계, 기업, 노동계, 언론에서 각양각색의 해석과 대책을 내놓고 있다. 고용주 쪽에서는 ‘배가 불러서’라는 고전적 설명도 빠트리지 않는다. 에드 랜시 미국 맥도널드 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폭스 비즈니스> 인터뷰에서 “(실업수당 등) 실업에 대한 혜택이 아주 많으니까 일자리로 돌아올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코로나 대책으로 가계에 직접 지급한 돈이 일자리 복귀 동기를 약화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은 노동력 부족에 대한 보고서에서 집값 등 자산가치 상승도 조기 은퇴를 부채질하는 것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밖에 도널드 트럼프 전임 행정부 때의 반이민 정책과 코로나 이후의 입국 제한이 이민자 수를 크게 줄인 것도 노동력 공급을 빡빡하게 만든 요인으로 꼽힌다. 백인 기혼 여성 퇴직이 더 두드러진다는 점을 두고선, 코로나19 사태 이후 가족 돌봄의 필요가 커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한다. 보건과 돌봄 분야 인력이 크게 부족해졌다는 게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만성적인 ‘일자리 부족’으로 노동시장에서 ‘갑’의 지위를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기업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비명’을 질러대고 있다. 맥도널드와 스타벅스는 종업원이 부족한 일부 매장의 영업시간을 축소했고, 버거킹은 메뉴를 단순화해 일손 부족에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주택 건설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는 현장도 있다.
일부 기업들은 임금 인상 등 다양한 유인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창구 직원 등 하급직에게 750달러(약 89만원)씩 보너스를 준 뱅크오브아메리카는 올해는 회사 주식을 무상으로 주겠다고 했다. 애플은 판매직 급여를 올리고, 파트타임 직원에게도 유급휴가를 준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최대 주택용품 유통업체 홈디포는 구직 신청 이튿날 바로 채용해주겠다고 했다. 봄철 주택 새단장 수요 증가에 대비해 인력 10만명을 확보하기 위한 정책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가며 기업들이 ‘대복귀’(Great Return)를 추진하는 상황에서 많은 직원들이 재택근무 종료를 원하지 않는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고용주들을 초조하게 만들고 있다.
일손 부족은 저임금 영역에서 더 두드러진다. 저임금 서비스직 일자리가 많은 숙박, 음식점·술집, 유통 쪽 빈자리가 상대적으로 더 많다 보니 이쪽 임금 인상률이 더 가파르다. 그래서 또 하나의 기현상이 생겼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임금 하위 25%의 연간 임금 상승률(5.1%)이 상위 25%(2.7%)의 거의 두 배에 달한 것이다. 지난 수십년간 보기 어려웠던 흐름이다. <월스트리트 저널>이 지난달 노동력 부족을 다룬 기사의 첫 문장은 “미국 노동자로 살기에 좋은 시대다”였다.
서구 국가 중 노동의 협상력은 바닥이고 불평등 정도는 상위인 미국은 정말 노동자들 삶의 질을 올리는 길로 본격적으로 접어든 것일까? 노동 계층은 별다른 대가를 치르지 않고 그 열매를 얻는 것일까? 미국 노동시장의 현실을 조금 더 면밀히 들여다보면 이와는 다른 현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에너지가 제로라서 일할 수가 없어요. 끊임없이 꺼지는 휴대폰 배터리 같아요.”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찰리 매콘(32)은 이달 초 <시비에스>(CBS) 뉴스에 이렇게 말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두 차례 감염됐다는 그는 감염 당시 증상은 가벼웠지만 이후 극심한 피로와 인지적 문제가 생겨 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정확한 의학적 진단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평생 회복하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도 크다고 했다.
조기 퇴직과 노동력 부족 문제에서 빠트릴 수 없는 게 미국을 휩쓴 코로나로 인한 후유증이다. 8000만명 가까운 이들이 확진됐으니 후유증을 겪었거나 지금도 겪는 사람도 많을 수밖에 없다. 브루킹스연구소는 이런 식으로 일터에 복귀하고 싶어도 복귀하지 못하는 이들이 지난해 말 기준으로 빈 일자리 1060만개 중 15%는 차지한다고 추산했다. 노동력 부족으로 일부 노동자들이 더 나은 처우를 받는다면 그 바탕에는 코로나 감염으로 건강을 망쳐 일하기 어렵게 된 이들의 아픔도 있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미국인들의 일과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 게 퇴직 물결을 일으켰다는 진단은 이런 현실에 비추면 ‘한가한 해석’으로 들린다.
유의미해 보이는 임금 인상에도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뀐 가격표가 월급봉투를 노리는 것이다. 1월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7.5%로 40년 만에 최고였다. 기업들이 비용 증가를 즉각 상품과 서비스 가격에 전가하는 것이다. 노동자들 입장에서 보면 조금 더 주더니 그만큼, 때로는 그보다 더 많이 빼가는 꼴이다.
이번 노동시장의 ‘격변’은 파트타임 일자리 확대 등 노동조건 악화 문제를 구조적으로 개선하려는 움직임으로도 연결되지 않고 있다. 노동력 부족으로 전보다 일자리를 구하기가 쉬워진 업종들이 있고, 일부에서 더 나은 일자리 기회를 모색할 여지가 확대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노동자로 살기에 좋은 시대’라는 말은 너무 나간 표현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단발적 처우 개선에 그칠 게 아니라 이번 상황을 저임금 영역의 노동조건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고 개선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b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