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사 영업직원의 애환
하루 13∼14곳 병원 도는데
문전박대 당하는 경우 잦아 주문보다 물량 더 떠넘겨
약사에게 사정하며 밀어내기
안 받을 땐 ‘리베이트’ 약속 목표량 채웠다 해도 안심 못해
다음 목표 높아져 다시 ‘영업전쟁’ 안녕하세요. 저는 제약회사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한성실(가명·31·남)이라고 합니다. 영업 사원 생활 5년차인 저는 요즘처럼 뒤통수가 따가운 적은 없었습니다. ‘대리점주를 쪼는 갑이다’, ‘밀어내기 한다’고 누군가 지켜보는 것 같습니다. 억울하냐구요? 저도 남양유업 영업 사원의 녹취록을 읽긴 했는데 심하긴 심하더라구요. 그래도 할 말은 많습니다. 잘나갈 때는 회사의 매출을 올리는 첨병이었다가, 이런 사고라도 터지면 ‘나몰라라’ 하는 게 회사거든요. ‘휴우~.’ 제가 하는 일은 개인병원을 상대로 약을 파는 제약 영업입니다. 제약 영업은 영업 중에서 힘들기론 다섯 손가락 안에서 빠지지 않을 곳이죠. 출근은 좀 편합니다. 일주일에 3번 정도 사무실에 갔다가 나오고, 나머지는 바로 병원으로 갑니다. 하루에 13~14곳을 도는데, 의사 선생님의 얼굴도장이라도 찍으려면 부지런히 돌아야 하죠. 처음에는 문도 안 열어주는 냉대도 많이 당했습니다. 그럴 땐 퇴근할 때쯤 찾아가 문 앞에서 무작정 기다립니다. 그러곤 인사만 드리고 나오는 거죠. ‘쿨하다구요?’ 제품 이야기부터 꺼내는 것은 ‘하수’입니다. 얼굴을 익히다 보면 병원 문도 열리고, 식사를 함께 할 음식점 문도 열립니다.
개인병원 영업은 그래도 ‘양반’입니다. 종합병원을 상대로 하는 친구는 평일엔 술 접대에 주말엔 골프 비용 계산에 정신이 없더라구요. 제약회사 직원을 불러 사소한 일을 부리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그런 선생님은 피하고도 싶지만, 이 동네는 평판도 중요합니다. 괜히 그 선생님을 제쳤다가 찍히면 다른 병원에도 안 좋은 소문이 날 수 있으니 챙길 수밖에 없죠. 문득 이런 것까지 하며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혼자 깨끗이 영업한다고 해서 바뀔까요?
제가 바꿀 수 없는 게 또 있습니다. 이른바 ‘밀어내기’ 영업 관행이죠. 주문받은 것보다 더 큰 물량을 가져다 맡기는 것인데요. 병원보다는 약국에서 주로 합니다. 매달 매출 목표를 맞춰야 하다 보니 약사 선생님한테 가서 사정을 하고 밀어내는 것이지요. 밀어내기 안 받겠다는 선생님한테는 다음엔 리베이트(판매격려금) 잘 드리겠다고 달래죠.
잘해서 목표를 채우면 되지 않겠냐구요? 저도 그러고 싶죠. 하지만 회사는 목표를 달성했다고 해서 직원을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달별로 목표는 더 올라가죠. 이번달에 3000만원 달성했으면, 다음달엔 3500만원으로 올라가는 식이죠. 이렇게 올라가면 영업 직원의 숨도 함께 차오릅니다. 목표를 못 채운다고 회사에서 바로 잘리진 않습니다. 하지만 실적 미달로 사무실에 들어와 운전기사를 하거나 교육을 받고, 수당이 차압되는 등 ‘굴욕’을 당하면 밀어내기의 유혹을 떨쳐내기는 사실 힘듭니다.
이제 누가 바꿀 수 있을지 아시겠죠? 우리 회사 사장님의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밀어내기’는 절대 안 없어집니다. 사장님도 그렇게 영업 현장에서 커왔고, 이게 관행이다 하면 월급 받는 우리는 할 말이 없거든요. 밀어내기가 이상한 것은 말단 직원부터 소장님까지 다 아는데 말이죠.
가끔은 서울에서 외국계 제약회사에 다니는 친구도 부럽습니다. 그 친구는 대형병원을 상대로 영업하는데, 외국계 회사는 주로 병원에서 쓰는 전문약을 팔거든요. 전문약은 투약 대상도 한정돼 있고, 약의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어 밀어내기를 하는 경우는 없다고 합니다. 또 의사 선생님을 만나서도 약에 관한 논문이나 연구 결과를 전달한다고 하네요. 밀어내기를 하는 것보다 훨씬 보람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친구는 국내 회사의 문제점도 지적해 주더군요. 영업 직원들은 사실 ‘미친듯이’ 영업을 하면, 많은 인센티브를 받거나 승진을 하기가 쉽습니다. 또 회사에서도 영업 직원의 경력 개발을 위한 사내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놓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 보니 영업 직원들은 다른 직군으로의 경력 개발보다는 사장의 ‘오른팔’이 되기 위해 무리한 영업을 할 수밖에 없다고 분석하더라구요. 맞는 말입니다.
아, 벌써 한참을 얘기했군요. 이렇게 비 오는 장마철엔 병원을 도는 데 시간이 더 듭니다. 우리도 열심히 할 테니, 사회적으로 영업 직원들이 공정하게 일하고, 보람 있게 일할 방법 좀 빨리 찾았으면 좋겠네요.
이 글은 현직 제약회사 영업 직원 2명의 인터뷰를 토대로 작성됐습니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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