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직위파괴’ 바람 분다
임원자리 없애는 등 ‘수평관계’ 확산…“승진재미 없다” 푸념도
내년부터 에스케이그룹 임원들의 명함에서 전무, 상무 호칭이 사라진다. 에스케이그룹은 14일 “지주회사인 에스케이㈜와 텔레콤, 에너지 소속 임원들의 직위를 없애는 대신, 센터장이나 실장 등 직책명으로 부르게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앞서 에스케이텔레콤은 지난해부터 기존 부장급 이하 직원들의 직위를 없앤 뒤 모두 매니저로 부르고 있다.
대기업들 사이에 ‘직위 파괴’ 바람이 거세다. 조직 안 서열을 나타내는 직위 체계를 간소화해 의사결정을 빠르게 하고 수평적 관계를 확산시키자는 취지다. 일부에서는 외부에서 부를 호칭이 마땅치 않다거나 내부적으로 ‘승진의 재미’가 사라졌다는 푸념도 나온다. 그러나 연공서열 중심의 전통적인 조직체계에서 벗어나려는 직위 개편 움직임은 갈수록 대세를 이루고 있다.
엘지그룹은 2000년 5단계의 임원 체계를 사장-부사장-상무로 줄였다. 삼성그룹도 2001년 6단계의 임원 서열에서 이사보와 이사직을 없앴다.
씨제이 임직원들끼리는 서로 부를 때 ‘ㅇㅇㅇ 상무님’ ‘ㅇㅇㅇ 과장님’ 식으로 직위를 붙이지 않고 ‘ㅇㅇㅇ님’이라 한다. 이런 호칭 폐지 움직임은 아모레퍼시픽과 해태제과 등 다른 기업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지난해까지 이사 직위를 뒀던 현대중공업은 올해 상무로 호칭을 바꿨으며, 롯데그룹도 내년부터 이사 직위를 없애기로 했다. 이제 주요 그룹에서 이사 직위를 고수하고 있는 곳은 현대·기아차그룹 등 손을 꼽을 정도다.
직책 중심으로 조직체계를 재편한 기업에서는 서열이 높다고 높은 직책을 맡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그 자리에 오르게 된다. 따라서 한 자리를 놓고 전무와 상무, 부장이 경합을 벌이는 등 내부 경쟁은 더 치열해질 가능성이 높다. 최근에 나타나고 있는 직위 개편 흐름은 성과와 능력 위주의 인사제도 변화, 직무와 직책급으로 임금 체계가 바뀌고 있는 데 따른 현상이다.
에스케이에너지의 한 임원은 “직책 중심으로 조직이 바뀌면 책임과 권한이 보다 분명해진다”고 말했다. 입사 7년째인 오형주 현대홈쇼핑 직원은 “직급이 간소화하면서 업무 협조를 요청할 때 직위가 주는 부담이 적고 일 중심으로 진행된다”며 “조직문화가 수평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직위 체계 변화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직원들의 승진 의욕이 무디어지고, 조직의 기강이 무너진다는 불평도 있다. 현대차의 한 임원은 “한 계단씩 밟고 올라가는 직위 상승의 성취감과 동기 부여가 있다는 점에서 현 체계를 선호하는 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내부적으로 위계질서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르면서 연차에 따라 대리, 과장, 차장 등의 호칭이 부활한 곳도 있다. 대우조선해양 관계자는 “외부 사람과 만날 때 마땅한 호칭이 없어 어려움을 겪은 적이 적지 않다”며 “내부적으로도 호칭은 대충 얼버무리는 불편함이 많다”고 말했다.
산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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