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가격 결정과정 변화
한광덕 기자의 투자 길라잡이
가격 안써내면 우선배정…주관사 고가 책정 악용
주가폭락에 경쟁률 낮아져 소액 투자자엔 기회 올 봄 싱그럽게 피어났던 새내기주 시장이 가을 들어 추풍낙엽 신세다. 지난 5월에 상장된 9종목은 상장 첫날 공모가 대비 평균 86% 올랐고 지금도 한 종목만 빼고 모두 공모가를 웃돌고 있다. 특히 한라레벨은 159%의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9월에 기업을 공개한 10종목의 평균 수익률은 현재 -23%다. 에스티엑스팬오션을 제외한 9개 종목이 공모가 밑에서 헤매고 있다. 지난 여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 기업공개 선진화 방안=참여정부는 제도를 바꿀 때 ‘선진화’란 표현을 즐겨 쓴다. 금융감독원도 주식인수업무 선진화 방안을 마련해 7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기업공개 제도를 글로벌 기준으로 개선해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키워내겠다는 야심작이었다. 선진화 방안의 핵심은 주관 증권사에게 공모가격과 물량배정 결정의 사실상 전권을 주는 데 있다. 그동안 일부 대형 기관투자가들이 공모 신청 과정(수요예측)에서 집중적으로 낮은 가격을 써내 공모가격을 후려치고 주관사는 상장 뒤 주가가 떨어지면 일반 청약자들의 주식을 공모가의 90%로 되사줘야 하는 ‘풋백옵션’에 발목이 잡혀 공모 기업들이 제 값을 받지 못한 사례가 적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선진화 방안은 기관들이 가격을 지정하지 않고도 공모에 참여할 수 있게 했고 풋백옵션도 없앴다. 바로 이 부분이 최근 공모가 거품의 빌미가 되고 있다. ■ 선진화 전후 달라진 공모가=지난 5월 기업공개가 이뤄진 한라레벨의 경우 주관사가 제시한 희망 공모가격 범위는 8천~9천원이었다. 기관들이 제시한 신청가격의 가중평균가격은 공모 희망가 중간쯤인 8551원으로 나왔고 주관사는 이와 비슷한 8600원으로 공모가격을 확정했다. 반면 풋백옵션 폐지가 첫 적용돼 7월에 공모한 아로마소프트의 확정 공모가는 애초 공모 희망가 범위인 7000~7500원을 뛰어넘은 8200원으로 결정됐다. 기관들의 수요예측에서 8200원보다 낮게 써낸 신청 물량이 8배 넘게 많았는데도 가격을 제시 안한 67%에 이르는 ‘백지 신청’ 물량을 최우선 참여 가격(?)으로 간주해 공모가를 마음껏 끌어올린 것이다. 아로마의 주가는 현재 5280원으로 공모가에 비해 36% 떨어진 상태다. ‘백지 신청’이 많은 것은 확정된 공모가 밑으로 써낸 기관들에게는 예전과 달리 1주도 배정해주지 않는 주관사 자율권한의 위력을 의식한 탓이기도 하다. 개인들의 ‘묻지마 청약’을 방지하려는 선진화 방안이 기관들의 ‘묻지마 가격’을 조장하고 있는 셈이다. 주관사 인수 수수료는 공모 총액과 비례하는데, 심지어 공모액이 얼마 이상이면 요율 자체가 올라가도록 계약을 맺는 경우도 있다. 최저 희망 공모금액이 160억원이었던 ㄴ기업은 170억원 이상이면 요율의 절반을 올려주기로 맺은 옵션을 덕분인지 184억원의 공모자금을 끌어 모았다. 더 심각한 부작용은 주관사들이 공모가의 출발점이 되는 기업가치 산정과정을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상장된 유사기업의 주가수익비율을 적용한 상대가치나 현재가치 할인모형을 활용한 절대가치를 제시했는데, 지금은 유가증권신고서에 유사기업의 재무제표 정도만 달랑 보여주거나 아예 가치평가의 어떠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 경우마저 있다. 투자자들을 정보의 비대칭적 상황으로 몰아넣고 선택을 요구하는 것은 선진화 방안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또 강화된 권한에 걸맞는 주관사들의 책임규정은 사후 조서 작성 등 매우 빈약하고 실효성마저 의심스러운 것들이다. ■ 일반 투자자의 선진적 대응은=뜻밖의 손실을 입은 청약자들 사이에 풋백옵션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자신의 투자 실패를 증권사에 보상해달라는 것은 시장 친화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제까지 땅 집고 헤엄치는 식으로 뭉칫돈을 싸들고 수십개 계좌로 청약해 경쟁률이 수백대1을 넘어간 공모주 시장은 비정상적이었다. 이제 개인도 공모주 투자가 고위험 고수익으로 바뀌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유통시장에서 가치주를 고르듯 청약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최근 신규주들이 폭락하고 있는 것은 발행시장의 거품을 유통시장이 걷어내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체면을 구긴 기관들도 ‘묻지마 신청’을 자제할 수밖에 없어 공모가는 다시 합리적 수준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미 공모가가 희망가격의 하한선 밑으로 결정된 기업이 다시 나오고 있다. 경쟁률이 낮은 지금 그 길목을 지켜볼 때다.
한광덕 기자 kdhan@hani.co.kr
주가폭락에 경쟁률 낮아져 소액 투자자엔 기회 올 봄 싱그럽게 피어났던 새내기주 시장이 가을 들어 추풍낙엽 신세다. 지난 5월에 상장된 9종목은 상장 첫날 공모가 대비 평균 86% 올랐고 지금도 한 종목만 빼고 모두 공모가를 웃돌고 있다. 특히 한라레벨은 159%의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9월에 기업을 공개한 10종목의 평균 수익률은 현재 -23%다. 에스티엑스팬오션을 제외한 9개 종목이 공모가 밑에서 헤매고 있다. 지난 여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 기업공개 선진화 방안=참여정부는 제도를 바꿀 때 ‘선진화’란 표현을 즐겨 쓴다. 금융감독원도 주식인수업무 선진화 방안을 마련해 7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기업공개 제도를 글로벌 기준으로 개선해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키워내겠다는 야심작이었다. 선진화 방안의 핵심은 주관 증권사에게 공모가격과 물량배정 결정의 사실상 전권을 주는 데 있다. 그동안 일부 대형 기관투자가들이 공모 신청 과정(수요예측)에서 집중적으로 낮은 가격을 써내 공모가격을 후려치고 주관사는 상장 뒤 주가가 떨어지면 일반 청약자들의 주식을 공모가의 90%로 되사줘야 하는 ‘풋백옵션’에 발목이 잡혀 공모 기업들이 제 값을 받지 못한 사례가 적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선진화 방안은 기관들이 가격을 지정하지 않고도 공모에 참여할 수 있게 했고 풋백옵션도 없앴다. 바로 이 부분이 최근 공모가 거품의 빌미가 되고 있다. ■ 선진화 전후 달라진 공모가=지난 5월 기업공개가 이뤄진 한라레벨의 경우 주관사가 제시한 희망 공모가격 범위는 8천~9천원이었다. 기관들이 제시한 신청가격의 가중평균가격은 공모 희망가 중간쯤인 8551원으로 나왔고 주관사는 이와 비슷한 8600원으로 공모가격을 확정했다. 반면 풋백옵션 폐지가 첫 적용돼 7월에 공모한 아로마소프트의 확정 공모가는 애초 공모 희망가 범위인 7000~7500원을 뛰어넘은 8200원으로 결정됐다. 기관들의 수요예측에서 8200원보다 낮게 써낸 신청 물량이 8배 넘게 많았는데도 가격을 제시 안한 67%에 이르는 ‘백지 신청’ 물량을 최우선 참여 가격(?)으로 간주해 공모가를 마음껏 끌어올린 것이다. 아로마의 주가는 현재 5280원으로 공모가에 비해 36% 떨어진 상태다. ‘백지 신청’이 많은 것은 확정된 공모가 밑으로 써낸 기관들에게는 예전과 달리 1주도 배정해주지 않는 주관사 자율권한의 위력을 의식한 탓이기도 하다. 개인들의 ‘묻지마 청약’을 방지하려는 선진화 방안이 기관들의 ‘묻지마 가격’을 조장하고 있는 셈이다. 주관사 인수 수수료는 공모 총액과 비례하는데, 심지어 공모액이 얼마 이상이면 요율 자체가 올라가도록 계약을 맺는 경우도 있다. 최저 희망 공모금액이 160억원이었던 ㄴ기업은 170억원 이상이면 요율의 절반을 올려주기로 맺은 옵션을 덕분인지 184억원의 공모자금을 끌어 모았다. 더 심각한 부작용은 주관사들이 공모가의 출발점이 되는 기업가치 산정과정을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상장된 유사기업의 주가수익비율을 적용한 상대가치나 현재가치 할인모형을 활용한 절대가치를 제시했는데, 지금은 유가증권신고서에 유사기업의 재무제표 정도만 달랑 보여주거나 아예 가치평가의 어떠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 경우마저 있다. 투자자들을 정보의 비대칭적 상황으로 몰아넣고 선택을 요구하는 것은 선진화 방안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또 강화된 권한에 걸맞는 주관사들의 책임규정은 사후 조서 작성 등 매우 빈약하고 실효성마저 의심스러운 것들이다. ■ 일반 투자자의 선진적 대응은=뜻밖의 손실을 입은 청약자들 사이에 풋백옵션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자신의 투자 실패를 증권사에 보상해달라는 것은 시장 친화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제까지 땅 집고 헤엄치는 식으로 뭉칫돈을 싸들고 수십개 계좌로 청약해 경쟁률이 수백대1을 넘어간 공모주 시장은 비정상적이었다. 이제 개인도 공모주 투자가 고위험 고수익으로 바뀌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유통시장에서 가치주를 고르듯 청약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한광덕 기자의 투자 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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