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조합 사무실에서 만난 윤 조합장.
“건설사들의 ‘묻지마 공사비 증액’ 관행이 공사비 거품을 낳고, 이게 비싼 아파트값으로 이어진다고 봐요. 재개발·재건축이라고 하면 부동산 투기를 먼저 생각하는데, 한국 사회 투명성이랑 연관된 문제도 큽니다. 눈먼 돈이 천지예요.”
지난달 21일 서울 강남구 개포주공4단지 재건축 조합 사무실에서 만난 윤석양(54) 조합장은 ‘투명성’, ‘상식’, ‘청렴’과 같은 말을 자주 했다. 비리와 유착한 집단의 몸통으로 주목돼 수사 대상으로 전락해왔던 ‘재건축 조합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었다. 단순히 특이한 조합장이어서일까. 윤 조합장의 이력을 알게 되면 이런 의문은 풀린다. 1990년 육군보안사가 천여명에 이르는 민간인을 불법 사찰한다는 사실을 폭로해 세상을 놀라게 했던 ‘윤 이병’이 바로 그다. 폭로를 위해 탈영까지 했던 그는 ‘군무이탈죄’로 2년 복역한 뒤 1994년 출소해 장애인인권단체 등에서 일하다 2006년 개포주공4단지 아파트를 매입했다고 한다.
그의 취임 일성은 “청렴한 조합을 만들어 시공사와 갑을 관계를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지난 5월 취임하자마자 조합원들의 숙원이었던 불투명한 공사비 문제 해결에 팔을 걷어붙였다. 공사비 검증제도 신청에 필요한 공사비 자료 제출을 시공사에 요구하고, 국토교통부를 찾아 관련 제도 개선을 청원하기도 했다. 공사비 문제와 관련해 대동소이한 처지에 있는 인근 재건축 사업장 조합원들은 그를 ‘운동권 조합장’이라 부르며, 개포주공4단지를 부러워한다는 후문이다.
“우리나라가 60년대 후진국도 아니고, 수입산이 무조건 국산보다 비싸고 좋습니까? 국산도 품질 좋은 게 많은데, 자재를 단순히 수입산으로 변경한다 해놓고 공사비를 증액해요. 브랜드, 사양, 가격에 대한 구체적 설명도 없이 텔레비전, 세탁기, 냉장고 다 포함해서 그냥 1천만원이라고 하는 식이에요. 공사비에 거품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죠. 공사비 검증을 거치면 감액이 이뤄질 거라고 봐요.”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는 공사비는 결국 ‘공사비 거품’에 대한 의심을 낳았다. 공사비 세부 내역서가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도금을 내야 하는 상황에 항의하는 뜻으로 중도금 납부일에 ‘18원’을 입금하는 조합원들도 나왔다.
정비사업에서 조합의 위상을 보여주는 일이 ‘시공사가 조합에 얼마나 찾아 오느냐’라는데, 그가 조합장이 되고 나서는 시공사가 조합을 찾는 일이 많아졌다고 한다. ‘운동권 조합장’은 ‘갑’이 된 것일까. “대기업을 상대로 조합이 갑이 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에요. 대기업 시공사의 돈과 정보력, 조직과 전문성이 조합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막강하잖아요. 다만 우리는 시공사에는 없는 2900여명의 조합원이 있어요. 시공사가 제일 경계하는 게 조합원들의 단합이라고 하데요.”
그는 조합 운영의 상식부터 차근차근 세우는 중이다. 매주 일요일 ‘주간 업무보고’가 대표적이다. “너무 당연한 일인데 조합원들이 댓글을 달고 정말 좋아하는 거예요. 업무보고가 기다려진다고도 하고요. 그렇게 안 하는 조합이 대부분이니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일도 이렇게 좋아하는구나 싶더라고요. 재개발·재건축 사업이 얼마나 불투명한지 보여주는 일이죠.”
글·사진 진명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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