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에 사는 엽정훈(41)씨는 아파트 현관에 붙어 있던 ‘부동산거래 전자계약 시스템’ 포스터를 며칠 동안 눈여겨봤다. 집을 팔고 다시 사야 했던 엽씨의 눈을 잡아끈 것은 대출 우대금리 적용이었다. 전자계약이 낯선 제도인데다 큰돈이 오고 가는 주택매매라 처음엔 망설였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자료를 살펴본 그는 전자계약을 하기로 결심했다. 지난달 공인중개소를 찾아 계약을 끝낸 엽씨는 “생각보다 간단했다”고 했다.
공인중개사가 컴퓨터에서 ‘국토교통부 부동산 전자계약 시스템’에 접속해 아파트 매매계약서를 작성한 뒤 중개사 본인의 스마트폰 앱으로 보낸다. 중개사가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조건을 설명하고 거래 당사자가 휴대폰 본인인증을 거쳐 화면에 서명하면 계약이 끝난다. 종이에 서명하고 도장 찍는 과정 없이 계약이 이뤄진다. “기다렸다가 스마트폰에 서명한 게 끝이었어요. 정부가 만든 시스템이니 안전하다는 생각도 들고 전체적인 과정이 쉬웠어요. 은행에서 0.2%포인트 금리 인하 혜택도 받았고요.” 엽씨는 전자계약 자체보다 계약 상대방을 설득하는 작업이 더 어려웠다고 한다. “저는 전자계약의 장점을 아는데 상대방은 제도 자체를 몰랐거든요. 나이 든 분이었는데 익숙하지 않으니까 좀 꺼렸어요. 안전하다고 차분히 설명하니 동의해 주더라고요.”
다음달부터 서울에 사는 사람이면 부동산 거래를 할 때 엽씨처럼 전자계약을 할 수 있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2월부터 서울 서초구에서 종이 없이 주택 매매·임대차 계약을 할 수 있는 전자계약 시스템 시범 운영을 해왔고, 8월부터는 서울 전체로 확대해 시행할 예정이다. 다만 의무는 아니고 선택 사항이다. 당분간 공인중개사만 전자계약 시스템을 사용할 수 있다. 이는 지난해 주택매매 135만건 가운데 95만건(70%)이 중개소를 통했을 만큼 거래 의존도가 큰 점을 고려한 것이다. 또 시스템 운영을 안정화하는 단계를 거쳐야 하기에 도입 초반에 사용 범위를 제한하는 측면도 있다. 국토부 관계자는 “부동산 거래가 큰돈이 오가는 만큼, 안전성이 가장 중요하다. 일단 중개소 중심으로 운영하고, 잘 정착되면 일반인 사이에 직거래 계약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 중개소를 통하지 않고도 전자계약 거래가 가능해진다.
중개소만 시스템 접근권을 가진 현재는 전자계약 과정이 대체로 단순한 편이다. 부동산 거래 당사자들은 우선 국토부 전자계약 시스템 누리집(irts.molit.go.kr)에 들어가 전자계약이 가능한 중개사무소를 확인해야 한다. 여기엔 전자계약 시스템에 등록한 중개소의 이름·전화번호·주소·대표자·지도까지 상세히 나와 있다. 이달 기준으로 서울 서초구에만 155개 중개소가 등록돼 있다. 계약서 작성은 중개사가 하는 만큼, 고객들은 거래 내용을 확인하고 본인 인증 서명만 하면 된다.
전자계약을 이용하면 주택 매수자나 임차인에겐 특히 혜택이 많다. 케이비(KB)국민은행에서 주택담보·전세자금 대출금리가 0.2%포인트 인하된다. 예를 들어 1억7천만원을 빌렸다면 417만원을 아끼는 셈이다. 신한카드도 5천만원 내에서 대출금리를 최대 30%까지 할인해준다. 전세나 보증부 월세 세입자가 전자계약을 했다면 자동적으로 확정일자가 부여돼 주민센터에 갈 필요가 없는 것도 편리해진 점이다. 또 종이 계약서를 따로 보관할 필요 없이 전자계약 시스템에 접속해 본인 인증을 하면 언제든 계약 내용을 볼 수 있고, 출력을 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정부 시스템 내에서 안심하고 거래를 할 수 있다는 게 큰 이점으로 꼽힌다. 계약 과정에서 중개사의 사진과 함께 신원이 확인돼 무자격·무등록 불법 중개행위가 어려워진다. 지난해 경기도에선 다른 사람의 자격증을 빌려 중개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월세로 나온 집을 전세로 속여 세입자 17명으로부터 보증금 5억7천만원을 챙긴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큰돈을 건네야 하는 주택 매수자나 임차인 처지에선 이런 위험 부담을 덜 수 있다. 게다가 종이 계약서일 때는 문서 위·변조 가능성도 있었지만, 전자계약에선 아예 차단된다.
문제는 부동산 전자계약이 확산되기 위해선 뒤얽힌 이해관계의 산들을 넘어야 한다는 점이다. 전자계약의 혜택은 주로 주택 매수자와 임차인에게 집중돼 있다. 아울러 제도를 설계한 정부도 거래 투명화를 통해 시장을 정비하고 관련 통계를 손쉽게 축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제도의 확산에 키를 쥐고 있는 또 다른 축인 주택 매도자나 임대인, 공인중개사 쪽에선 명시적 혜택이 많지 않다. 오히려 거래 투명화가 초래할 소득 노출의 불안감이 큰 편이어서 제도 확산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올 2~6월까지 다섯달 동안 서울 서초구에서 시범사업을 벌인 결과 전자계약으로 부동산 거래가 이뤄진 사례는 단 3건에 그쳤다. 그나마 한 건은 시스템 개발자와 관련된 사람이 시험 삼아 계약한 것으로 실질적으론 2건이 전부다. 여기엔 전자계약 시스템에 대한 접근 권한을 지닌 중개사들이 제도 확산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사실 중개사 처지에선 전자계약을 했을 때 이득이 크지 않다. 일단 새로운 시스템이 익숙하지 않아 불편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전자계약으로 부동산 거래를 해본 윤하은 글로벌공인중개소(서울 서초) 대표는 “계약서 수정을 하려면 처음부터 내용을 다시 작성해야 하는 등 이용에 불편한 점이 있다. 시스템이 조금 더 단순화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중개사가 부동산 실거래가 신고를 따로 할 필요가 없어지는 점은 편리하다. 하지만 전자계약에 적극 나서기에는 뚜렷한 이득이 없어서 유인 효과가 떨어지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실제 그가 전자계약을 했던 계기는 특정 고객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무엇보다 임대소득과 중개사 수입의 노출이 얼마나 수용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주택매매 거래는 실거래가 신고로 어느 정도 투명해졌지만, 전세·월세 임대시장은 개인들이 비제도권에서 임대사업을 하고 있어 실태 파악 자체가 어렵다. 전체 주택 가운데 자기 집에서 살고 있는 가구가 53.6%이고 임차 가구는 46.4%를 차지한다. 또 2주택 이상을 보유한 다주택자는 172만1천명(2014년 기준)에 이르지만, 주택임대사업자로 등록한 사람은 10만3927명(6%)에 그친다. 누가 어디에서 얼마에 전월세를 놓고 있는지 전모를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서울 ㄱ공인중개소 관계자는 “전자계약을 하면 실시간으로 정부가 임대소득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임대인들이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개사들 사이에 관행이 되어 있는 등기·대출 소개 관련 ‘중간 수수료’ 문제도 전자계약을 어렵게 한다. 서울 ㄴ공인중개소 관계자는 “등기(소유권이전·전세권설정) 업무, 대출 등을 법무사와 은행에 연결해 주면서 중개소에서 일부 수수료를 받고 있다”며 “전자계약을 하면서 정부가 대출 금리, 등기 수수료 인하 혜택을 주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중개소로 돌아오는 수수료 몫이 없다”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황기현 한국공인중개사협회 회장은 지난 4월 취임식에서 공개적으로 전자계약 시스템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정부도 이런 걸림돌들이 만만찮다는 점은 알고 있다. 그래서 전자계약의 비중을 높이기 위해 공공임대주택에 이를 도입하고, 뉴스테이(기업형 임대주택)에도 적용을 검토하는 등 활성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국토부는 이를 통해 시장 투명성을 한 단계 높여야 임대주택 등 부동산 정책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에 국토부는 당장 9월 말부터 엘에이치(LH·한국토지주택공사)의 전세임대 계약에 이를 도입하기로 했다. 전세임대 사업은 입주 신청자가 중개소 등을 통해 조건에 맞는 전세주택을 찾아오면 엘에이치가 집주인과 직접 전세계약을 맺은 뒤 신청자에게 재임대하는 것으로, 올 하반기 규모가 1천여건에 이른다. 이밖에 정부는 민간기업들이 임대사업을 하는 뉴스테이 주택에도 전자계약 시스템을 적용할 방법을 다각도로 검토하고 있다. 국토부 관계자는 “뉴스테이 임대주택은 개인 간 거래가 아니고 기업과 개인 간에 이뤄지는 것이어서, 전자계약 시스템 도입이 좀 더 원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거래 당사자들이 적극 나서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국토부 관계자는 “국민들이 전자계약의 장점을 알고 중개소에 요구하고 나서야 이 제도가 활성화될 수 있다. 대출 금리 인하뿐만 아니라 좀 더 다양한 혜택을 주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종이 없는 부동산 거래’라는 정부의 야심찬 구상이 용두사미가 될지, 시장의 투명성을 이끌어내는 강력한 무기가 될지는 아직 물음표로 남아 있는 셈이다.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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