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값이 떨어지자 월셋집이 전셋집을 밀어내며 임대차 시장을 빠르게 점령하고 있다. 월세는 전세보다 주거비용이 높고 주거 안전성도 떨어진다. 지난 2월27일 서울 마포구의 한 공인중개소 창문에 월세 세입자를 구하는 광고지들이 빼곡히 붙어 있다.
[표지이야기] 임대차 시장의 표준이었던 전세와 보조였던 월세의 비중이 21.7%, 20.1%로 엇비슷해져 주거 안전성 떨어져 가난하고 젊은 사람들에게 불리, 이들 보호할 대책 거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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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5월 결혼하는 김종규(37)씨는 얼마 전 경기도의 24평(약 79m²) 주거용 오피스텔에 신혼집을 차렸다. 보증금 6천만원을 맡기고 다달이 월세 60만원씩 내는 ‘보증부 월세’ 계약이었다. 애당초 그의 선택지에 월세는 없었다. 대출을 받더라도 1억5천만원 정도의 전셋집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매달 내는 임대료가 부담스러운데다 신혼집에 월세라는 꼬리표를 다는 것도 달갑지 않아서다. 그러나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전세로 나온 소형 아파트는 없었다. 그나마 보증금이 많고 월세가 적은 보증부 월세를 찾는 게 최선이었다. “한 번도 신혼을 월세로 시작할 것이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양쪽 부모님께도 낯이 안 선다. 이렇게 전셋집을 마련하기도 어려운데 언제 내 집을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신혼집을 마련하는 풍경이 10년 만에 이렇게 달라졌다. 이전엔 전세로 신혼집을 마련한 뒤 전세금을 종잣돈 삼아 차근차근 내 집 마련 준비를 해나가는 게 신혼부부의 ‘정석’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요즘 신혼부부들 사이에선 그런 공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보증금에 추가로 매달 임대료를 내는 보증부 월세는 물론 보증금은 거의 없이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는 순수 월세로 신혼집을 마련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주택 임대차 시장의 구조가 전세에서 월세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951호 표지이야기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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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과 달리 아직도 전세가 명맥을 유지하는 건 현실적 제약 때문이다. 집주인들이 수익만을 좇아 전세를 월세로 모두 전환하기엔 세입자에게 돌려줘야 할 전세금·보증금이 너무 많다. LG경제연구원이 추정한 전세금과 보증부 월세의 보증금은 2010년 기준으로 259조원에 이른다. 전체 전·월세 주택 가격(769조원)의 33% 수준이다. 이미 상당한 가계빚을 떠안고 있는 집주인들한테 이 어마어마한 전세금을 모두 돌려줄 여력이 있을 리 없다. 앞으로 부동산 가격이 더 떨어진다 하더라도 전세가 완전한 종말을 맞지는 않으리라는 예상이 나오는 배경이다. 대신 월세의 비중이 주택 규모에 따라 달라지는 ‘월세 양극화’가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전문위원의 설명이다. “전세금 반환 부담이 적은 소형 아파트나 원룸 등은 지금도 월세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그러나 매매 가격이 9억원이 넘는 고가 주택은 집주인이 전세금을 돌려주기엔 부담이 커서 전세로 유지될 것이다. 그 중간은 월세와 전세의 중간인 반전세(보증부 월세)로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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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저축 효과가 있는 전세금은 서민층이 내 집 마련을 통해 중산층으로 이동하는 희망의 사다리로 활용됐다. 반면 월세는 서민층·저소득층이 미래를 위한 자산을 모으기 어렵게 만든다. 서울 마포구의 한 아파트 모습.
월세시대는 서민층이 중산층으로 올라서는 사다리도 서서히 무너뜨린다. 전세금 마련은 세입자에게 큰 부담이 되지만 목돈이 강제로 저축되는 긍정적 효과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상당수 서민들이 자산을 축적해나가며 계층 상승을 이룬 과정에 전세금이 적잖은 역할을 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매달 임대료만 내면 되는 월세에는 이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오히려 월세 지출로 가계의 가처분소득이 줄어드니 생활이 더 팍팍해질 가능성이 높다. 두 자녀를 둔 김소희(31)씨 사례가 그렇다. 그에겐 1년 전만 해도 내 집 마련의 희망이 있었다. 2억6천만원의 전세금이 그 증거였다. 그러나 급전을 융통하느라 전세금을 헐게 되니 상황이 금세 나빠졌다. 남은 전세금 1억5천만원으로는 4명의 가족이 살 전셋집을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보증금 2천만원에 월세 80만원짜리 15평(약 49m²)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한 달 500만~600만원의 수입에서 월세와 관리비로 100만원을 빼면 생활비와 교육비로 쓰기에도 빠듯하다. 전셋집에선 매일 돈을 모아가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매일 돈을 까먹는 느낌이다. 집의 노예가 됐다.” 월세시대는 젊은 세대에게 더 잔인하다. 열악한 임금에서 높은 월세를 빼고 나면 미래를 위해 투자할 여유 따위는 없다. 부모의 도움을 받을 처지가 아니라면 월세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한 달 살이’ 인생이다. 직장인 최희철(29)씨는 한 달 230만원의 수입 가운데 60만원가량을 월세와 관리비로 낸다. 보증금이 1천만원밖에 없어 반전세는 꿈도 못 꿨다. 월세와 생활비에 눌려 지난 2년간 직장생활을 하며 저축한 돈은 500만원도 안 된다. “이 속도라면 보증금 3천만원짜리 월세라도 얻으려면 6년은 더 있어야 한다. 100년 뒤에나 결혼할 수 있을 듯하다.” 대학교 졸업반인 고윤정(24)씨도 미래 희망을 월세방과 맞바꾼 지 오래다. 그는 대학에 입학한 뒤 내내 40만~50만원대 원룸 자취방에서 지냈다. 방값·생활비·등록금을 모으느라 학기 중에도 쉬지 않고 과외를 3개씩 했지만 늘 돈에 허덕였다. 이번 학기에는 대출을 받아 2천만~3천만원짜리 단칸 전세라도 얻어볼까 했지만 대학가에 그런 방은 없었다. 결국 그는 남들과 화장실·거실을 공동으로 쓰는 38만원짜리 월세에 다시 터를 잡았다. “가르치는 학생들의 중간·기말고사 때가 되면 내가 더 떨린다. 시험 성적이 잘 나와야 과외를 6개월 연장해 방값을 낼 수 있지 않겠나.” 사정이 이렇다보니 월세시장은 세대 간 갈등이 벌어지는 또 다른 전쟁터가 됐다. 갈수록 열악한 주거 환경에 내몰리게 된 젊은 세입자들은 집을 보유한 베이비부머(1955~63년생) 이상 장·노년층에게 적개심마저 보인다. 과거에는 시세 차익을 얻으려고 부동산 가격을 띄워 젊은 세대를 ‘하우스푸어’나 ‘렌트푸어’로 만들더니 이제 와선 임대료 욕심에 전세를 월세로 돌려 또다시 젊은 세대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의 32평(약 105m2) 아파트에 전세로 사는 강희택(37)씨의 생각이 그렇다. 그는 2년 계약 만료를 앞둔 두달 전에 집주인에게서 통보를 받았다. 2억6천만원의 전세를 보증금 1억5천만원에 월세 100만원으로 전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단순하게 계산해봐도 우리 부담을 3~4배는 높이겠다는 거였다. 50~60대가 30~40대를 착취하고 있다.” 깡통주택 안고 고꾸라지는 사람들
그러나 월세시장의 집주인들이 모두 매달 높은 임대료 수익을 원하는 장·노년층인 건 아니다. 가계부채에 짓눌린 하우스푸어들도 월세시장을 키우는 주요 공급처다. 은행 대출금을 빼면 남는 게 별로 없는 그들의 깡통주택을 받아줄 곳이 월세시장밖에 없는 까닭이다. 남궁희(37)씨는 1년 전 자신이 보유한 2억6천만원 전셋집을 보증금 5천만원에 월세 110만원짜리 반전세로 돌렸다. 2006년에 구입해 한때는 매매가가 5억5천만원을 호가하던 아파트가 3억원 후반대까지 고꾸라진 까닭이다. 은행 대출로 아파트에 2억4천만원의 근저당이 잡히자 2억원대에 전세를 들어오겠다는 세입자가 없었다. 매달 80만원의 대출이자를 감당할 방법이 없던 그는 이자라도 내려고 반전세를 선택했다. 대신 목돈이 사라지자 그도 보증금 5천만원에 월세 70만원짜리 반전세를 얻었다. “3년 전에 집을 내놨는데도 팔리지가 않아 속을 태웠다. 그래도 전세에서 월세로 돌리자 숨통이 트인다. 내 주변의 하우스푸어들은 거의 이런 식으로 견디고 있다.” 하우스푸어는 월세시장의 주요 공급자이자 수요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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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도 이런 월세 대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있는 듯했다. 대선 당시 공약집을 보면 구체적인 내용이 부실하기는 해도 서민·저소득층의 주거복지를 위한 방안으로 전·월세 상한제, 장기 임대주택 확대, 저소득층 월세 지원 등이 제시돼 있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정작 정부가 출범하자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로 전·월세 상한제 등 세입자 보호에는 반대하면서 각종 규제를 풀어 부동산 시장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서승환 연세대 교수를 지명했다. 철 지난 방식으로 또다시 부동산 경기를 띄우려고 주거복지 공약을 폐기하거나 후순위로 미룰 위험이 커진 것이다. 박근혜 정부에는 월세시대의 충격을 줄일 능력도, 의지도 없을 수 있다는 얘기다. 글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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