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새학기를 앞둔 서울시내 한 대학가 뒷골목 벽면에 하숙과 자취방 관련 전단지가 가득 붙어 있다. 쉬지 않고 오르기만 하는 등록금 폭탄에 하숙비 폭등까지 겹쳐 ‘청춘’의 활기가 넘쳐나야 할 대학가 분위기가 썰렁하고 우울하다. 1인당 국민소득은 세계 20위권이나 대학 등록금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인 대한민국. 그것도 모자라 대학가 하숙비와 집세가 올해 들어 평균 20% 정도 올랐다. 서울시내 대학 재학생 27만여명 중 14만여명이 지방 출신이다. 하지만 대학 기숙사는 전체 지방 학생 수의 약 12%에 불과해 지방 학생들은 따로 숙소를 구해야 하는 실정이다. “소를 팔아 대학 보낸다던 ‘우골탑’, 부모의 등골이 빠진다는 ‘인골탑’을 넘어, 쪽방에 쪼그려 자며 대학을 다녀야 하는 ‘쪼글탑’ 시대가 왔다”는 학생들의 푸념이 안쓰럽기만 하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아파트 키드의 생애] 어느 법대생의 ‘신(新) 우골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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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너 때문에 우리 집이 없어졌으니까 네가 벌어서 한 채 사줘야 한다.”
술이 얼큰하게 취하면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게 과연 가능하겠느냐”고 대꾸하고 싶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알았노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집 팔아서 아들 뒷바라지했다’는 말이 내 ‘부채’가 된 지도 벌써 십수 년째지만, 나는 여전히 변변한 직업 없는 대졸 백수이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던 1980년 태어나서 5살이 될 때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부산 초읍동의 자그마한 주택이었다. 슬레이트 지붕을 씌운 낡은 단층 건물로, 주택이라 부르기도 뭣할 정도였지만 3대가 함께 살았다. 이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말 그대로 ‘뒷방 노인네’였다. 1950년생인 아버지는 고졸 학력으로, 중동에서 건설노동자로 일하면서 돈을 모았다. 아버지는 거기서 만난 인맥을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한 야심찬 청년이었다. 큰아버지가 있는데 시부모를 모시고 살아야 했던 어머니의 불만이 점점 커지자, 아버지는 분가를 생각했다. 바야흐로 핵가족 시대로서 ‘우리 가족’이라는 새로운 세대의 태동기였던 셈이다. 내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1985년, 할아버지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돌아가셨다. 그 사건으로 아버지는 큰 충격에 빠졌고, 결국 그 집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큰아버지가 할머니를 모시게 되었고, 우리는 이듬해에 이사했다. 본격적인 우리 가족의 삶이 시작되었다.
“뛰지 말아라, 주인집 시끄럽다”
처음 이사한 집은 원래 살던 곳에서 가까운 2층 양옥이었다. 주인집은 1층이었고, 우리 집은 2층에 전세로 살았다. 나도, 어머니도 전세가를 기억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늘 “주인집 시끄러우니 뛰지 말라”고 하셨다. 아버지 사업이 차츰 자리를 잡아가자, 부모님은 당시 부산에서 새로 인기를 끌던 아파트로 곧 옮길 생각이었다. 이사한 지 얼마되지 않아 아버지는 퇴근 후 가족들을 차에 태우고 신축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탐방한 뒤 외식을 시켜주었다. 그렇게 몇 달을 고르고 골라 이사하게 된 곳이 해운대 근처 수영구에 있는 24평(79㎡)짜리 신축 아파트였다. 역시 매매가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으로 생긴 ‘우리 집’이지만, 막상 거기서는 그리 많은 추억을 만들지 못했다. 아파트 신축 공사가 한창이었기 때문에 친구들과 놀 만한 곳은 공사장 주변밖에 없었다. 학교 갈 때는 아버지가 차로 태워주고 돌아올 때는 어머니가 데리러 와야 하는 동네였다. 게다가 아버지가 통근하기 불편하다는 이유가 겹쳐 1년이 채 안 돼 다시 이사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아버지 공장에서 가까운 북구의 아파트였다.
새로 이사 간 동네는 그 시절의 ‘신도시’ 같은 곳이었다. 아파트가 곳곳에 들어섰고, 초등학교도 개교했다. 한 반의 절반 이상이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건설 경기의 호황에 힘입어 아버지의 사업- 경계석과 보도블록을 찍어내는 공장- 은 확대일로였다. 아버지의 허풍 섞인 말을 옮기면 “한 달에 아파트 한 채 살 정도의 돈을 벌었다”고 한다. 물론 순수입이 아니라 그저 아버지 손을 거쳐가는 돈이었을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을 일종의 ‘부도덕한 일’이라 여기는 사람이라, 어머니가 몇 차례 집의 수를 늘려가자는 제안을 했는데도 콧방귀만 뀌었다. 물론 이는 나중에 아버지의 후회 리스트 1위가 된다.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즐겼고 덕분에 나는 호사스런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내가 갖고 싶은 장난감은 말만 하면 다 사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갖게 된 유행 게임기 덕분에 친구들의 인기를 얻는 데 성공했다. 어머니는 여유 시간을 자식 교육 하는 데 쏟았다. 나와 동생들은 피아노, 태권도, 수영, 미술, 바이올린 등 당시 유행하던 모든 사교육을 배울 수 있었다. 여러모로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어머니의 모든 관심은 내 교육 문제에 집중되었다. 아무래도 북구의 교육 여건이 그리 좋지 않아 보였던 것이다. 고민 끝에 ‘부산의 8학군’이라 불리는 동래에 위치한 아파트로 이사했다. 당시 북구의 아파트 매매가는 1억 원이 채 안 되고, 이사 간 동래의 아파트는 1억 원이 조금 넘은 걸로 어머니는 기억했다. 북구의 아파트는 전세를 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팔았다고 한다. 매매가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면, 부모님 모두 부동산 투자 쪽으론 전혀 소질이 없고, 썩 내켜하지도 않은 모양이다.
‘부산의 8학군’으로 진출
동래는 그 전에 살던 북구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주차장에는 처음 보는 외제 차들이 수두룩했고, 부산 유명 백화점의 사장도 산다고 했다. 또래 친구들이 모두 선행학습에 매진하는데, 중학교 때 고교 과정을 배우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매일 방과후 새벽 2시까지 학원에서 공부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나도 자연스레 그들 중 하나가 되었다. 학원이나 가야 친구를 만날 수 있었고, 사춘기 소년답게 집에 있는 것보다 학원에서 늦게까지 남아 있는 편이 마음 편했다.
학교와 학원 수업에 시달리며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1995년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직전이었지만, 이미 아버지의 사업은 기울고 있었다. 몇 차례 위기 끝에 부도를 막지 못했고, 아버지 공장은 문을 닫았다. 다행스럽게도 당장 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비싼 아파트를 팔고, 멀지 않은 곳에 3천만~4천만 원 낮은 시세의 아파트로 이사 가는 정도였다. 여전히 자식 교육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다행히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가정 형편은 큰 변동이 없었다. 아버지는 매번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번번이 실패했지만, 남들 만큼의 생활 수준을 유지할 정도는 되었다.
문제는 내가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나는 부모님이 기대한 것 이상으로 공부를 잘해서 서울에 있는 명문대로 유학하게 되었다. 매년 10%씩 등록금이 폭등하기 시작한 1999년이었다. (입학할 때 200만 원대이던 등록금이 몇 년 지나자 300만 원 중반을 향했다.) 서울에서 대학 공부를 시키는 것은 엄청난 비용이 드는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3살, 4살 터울의 동생들도 차례로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둘째는 예술고등학교로 진학했고, 막내는 그림을 배우고 싶어 했다. 우리 삼남매에게 들어가는 교육비는 점점 커져갔다. 한 학기당 최소 1천만 원이 들었다.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집을 팔아야 했고, 그 과정은 몇 차례 반복되었다. 내가 서울 생활을 하는 동안 부산의 ‘우리 집’은 점차 변두리로 밀려나고 있었다. 동생들이 차례로 대학에 진학하자 부모님은 월세방을 전전하게 되었다. 야금야금 빼먹은 돈이 끝내 월세 보증금 1천만 원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 사이에 나는 서울에서 혼자 생활하는 방법을 익혀가고 있었다. 그래도 첫해엔 운이 좋았다. 기숙사에 들어갔고, 아르바이트 과외도 잘 구해져 생활비는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벌 수 있었다. 하지만 밖으로 떠도는 시간이 많다 보니 성적이 떨어져 더 이상 기숙사에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하숙집과 자취방이 흔한 시절이었지만, 신축 원룸들이 우후죽순 지어졌다. 학교 근처 자취방은 싸다 싶은 게 보증금 50만~200만 원에 월세 20만~30만 원이었다. 좀 괜찮다는 집은 보증금이 비싸고, 막상 가보면 그리 좋은 환경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고시원 방에 창문이 있느냐 없느냐로 월세 몇만 원의 차이, 딱 그만큼의 차별성이 있었다. 더 좋은 주거 환경에는 최소한 몇천만 원 단위의 보증금이 필요했다. 그런 곳에 사는 친구들이 부러웠지만, 과외비로 생활을 유지하는 나로서는 언감생심일 수밖에 없었다.
독방에 유폐된 듯한 서울 유학생활
기숙사에서 나와 처음 산 곳은 보증금 50만 원에 월세 25만 원을 내는 지하방이었다. 주방과 화장실은 공용이고, 방은 햇빛이 전혀 들지 않아 습했다. 씻는 것도 눈치 봐야 했고, 주방에서 라면 이외의 요리를 해먹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혹시 옆방 사는 사람들에게 폐가 될까봐 친구를 데려올 수 없어 점점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폐인이 될 것 같았다. 방을 옮기기로 했다. 이번에는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의 옥탑방이었다. 처음엔 모든 것이 좋았다. 그 전에 살던 지하방과 정반대의 환경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방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여름에는 불지옥 같은 더위에, 겨울에는 북극 같은 추위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연애를 하면서 여자친구와 돈을 합쳐 동거하기로 한 후에야 그런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발품을 팔아, 독립문이라는 낯선 동네에서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35만 원짜리 12평(39㎡) 원룸을 구했다. 학교에서 좀 멀지만 교통이 불편한 편은 아니었다. 동거 생활에 들어간 후에야 ‘인간답게 산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주방에서 음식을 해 먹을 수 있고, 손님 왔을 때 술상 차릴 공간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그러는 중에 군대 갈 때가 되었다. 2004년이었다. 공익요원이라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가야 했다. 공익 생활을 하면서 따로 생활비를 벌어가며 산다는 건 불가능했고, 다른 여러 사정도 겹치는 바람에 따로 거처를 마련할 방법이 없어 본가에서 출퇴근하게 됐다. 하지만 본가의 상황은 심각했다. 이미 ‘우리 집’은 없어진 지 오래고, 친척이 내준 낡은 집에서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20만 원을 내며 살고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지긋지긋하게 겪던 것과 별다를 바 없는 그런 집으로 들어가면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지는 저녁마다 술을 마셨다. 그때 처음 들었다. “아들, 너 때문에 우리 집이 없어졌으니까 네가 벌어서 한 채 사줘야 한다.”
차마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꼭 그러겠다’고 속으로 답할 뿐. 다행히 그런 처참한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다가 새로 시작한 사업 덕분에 형편이 좀 나아진 것이다. 군복무가 끝날 무렵 다시 우리 집이 생겼다. 해운대 신도시의 24평(79㎡) 아파트였다. 그나마 대출을 끼면 8천만 원에 살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한 어머니가 우겨서 산 것이다. “어차피 월세나 이자나 그게 그거”라고 했다. 아버지는 썩 내키지 않는 듯했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내 집 있는 것이 낫다며 우격다짐으로 계약서를 썼다. 나는 다시 대학생 신분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고시 실패, 초라한 스펙
서울에는 이미 졸업한 동생들이 사는 방이 있었는데, 나는 거기에 얹혀살기로 했다. 보증금 200만 원에 월세 40만 원이고 방이 2개라는 좋은 조건인데다, 집주인은 우리가 나가기 전까지 방세를 올리지 않겠노라 약속했다. 억세게 운이 좋은 경우였다. 그 방에서 나는 뒤늦은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게 우리 가족으로서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다시 부모님이 뒷바라지하게 되었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나는 사이에 부산의 ‘우리 집’은 다시 한 번 사라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8천만 원에 산 아파트가 그 사이에 1억4천만 원까지 올랐고, 집이 팔리자 순식간에 부동산 경기가 얼어붙었다. 2011년 일이다. “이거라도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어머니의 말씀이 새삼스럽지 않을 수 없다.
안타깝게도 난 고시에 합격하지 못했다. 시험의 관문은 점점 좁아져가고 있다. 몇 년간의 고시공부를 포기하고 취업시장으로 뛰어들어보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30대 중반이라는 나이도 나이거니와 남들에게는 기본이라는 ‘스펙’조차 제대로 갖춘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몇 번의 실패를 지켜본 아버지는 자꾸 로스쿨을 권한다. “그럴 돈이 어디 있느냐”고 핀잔을 줬더니 돌아오는 아버지의 대답이 걸작이다. 보증금을 빼서라도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다고 해도, 내가 부모님 생전에 집을 한 채 사줄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아버지도 알고 나도 안다. 그저 의례적으로 나누는 대화일 뿐이다.
“아들, 너 때문에 우리 집이 없어졌으니까 네가 벌어서 한 채 사줘야 한다.”
“네, 그럴게요.”
글 노지아 (가명)
기획·자료 제공 ‘아파트 키드의 생애’ 기획팀 김류미, 박재현, 김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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