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농장이나 온실 등으로 허가받은 개발제한구역 안 건축물에서 불법으로 운영되는 가상화폐 채굴장의 모습. 가상화폐 채굴기는 본체 케이스 없이 그래픽카드 5∼6개가 장착된다. 경기북부경찰청 제공
“요즘 그래픽카드 단품으로는 안 팔아요. 제품 나갈 때도 (조립PC에 들어간 그래픽카드 개수) 인증샷 다 찍어서 거래처(총판)에 일일이 수량 확인 보낸다니까요.”
지난 22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선인상가 2층의 한 조립피시(PC) 매장. 이 업체 사장 ㄱ씨는 ‘더 이상 가상화폐 채굴기를 팔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가 채굴기 판매 중단을 선언한 이유는 최근 그래픽카드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하반기 불어 닥친 암호화폐 열풍으로 그래픽카드 수요가 폭증한 데 더해 올해 초 시작된 세계적인 반도체 품귀 현상으로 최근엔 수입물량 자체가 뚝 끊겼다는 설명이다.
26일 가격비교 사이트 ‘다나와’를 보면, 지난해 10월 60만원대에 출시한 그래픽카드 ‘RTX 3070’ 모델의 가격(최저가 기준)은 올해 2월 90만원을 훌쩍 넘은 뒤 지난달 135만원을 기록했고, 이날 기준 205만원(현금가 194만원)에 판매되고 있다. 6개월 동안 3배 넘게 폭등한 셈이다. 채굴기에는 이처럼 ‘금값’이 된 그래픽카드가 한 대당 5~6개 장착된다. ㄱ씨는 “작년에 물량이 100개 들어왔다면, 올해는 많아봐야 7~8개 수준이다. 물건 자체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러나 일각에선 가상화폐 열풍에 따른 수요 증가 이외에도 그래픽카드 수입사들의 독특한 수입방식이 최근의 그래픽카드 가격 상승을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한다. 용산 전자상가에서 채굴기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한 업체 사장은 “수입사들은 그래픽 카드만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처리장치(CPU)와 메인보드 등도 한 묶음으로 수입하게 돼 있는데, 지난 수개월간 그래픽카드만 잘 팔리다 보니 메인보드 등의 재고는 수십만장이 쌓여있는 상황”이라며 “수입사 입장에선 (재고에 따른) 적자를 메꿔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래픽카드 물량을) 조금씩 풀면서 가격을 비싸게 받았던 것”이라고 귀띔했다. 과거 ‘수입사-총판-대리점’으로 이어지는 유통구조에서 중간상인이 마진을 높게 붙여 문제가 됐던 것과 달리, 최근엔 수입사들의 가격결정 권한이 커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앞서 지난해 9월엔 인텍앤컴퍼니 등 국내 그래픽카드 수입업체들이 ‘RTX 3080’ 초도 물량을 용산 전자상가를 거치지 않고 쿠팡 등 온라인몰을 통해 판매해 이른바 ‘용산패싱’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 당시 수입사들은 ‘유통단계를 줄여 합리적인 소비자 가격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용산 전자상가 상인들은 암호화폐 가격이 떨어지더라도 당분간 그래픽카드 가격 상승세는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래픽카드용 반도체 품귀 현상으로 국외 공장에서 제품 생산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이다. 채굴기 판매업체 사장은 “반도체가 안 풀리면 올 한 해 동안 수급난이 계속될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선담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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