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체 참사 유가족 최주완씨(왼쪽 둘째)와 조병열씨(왼쪽 셋째)가 31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가습기 살균제 참사 9주기 기자회견에서 ‘1559’ 숫자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지난 9년동안 가습기 살균제 참사로 세상을 떠난 피해자 수를 의미한다. 백소아 기자
법무부가 오는 28일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확대 법안을 입법예고하기로 한 가운데, 이들 제도가 국회 문턱을 넘으면 소비자 피해구제에 획기적 전기가 마련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기업의 잘못으로 막대한 피해를 보고도 까다로운 소송절차와 비용 탓에 소송과 배상 청구에 엄두를 내지 못했던 평범한 소비자들이 한꺼번에, 그리고 더 많은 배상을 받을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계는 ‘공정경제 3법’에 이은 개혁 입법 추진 움직임을 두고 “기업에 ‘핵폭탄’급 부담을 준다”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 주요국에선 이미 정착…MB·박근혜 정부도 추진
이번에 법무부가 추진하는 전면적 집단소송제는 기업의 잘못으로 대규모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피해자 50명 이상이 집단소송에서 이기면 나머지 피해자들도 소송 없이 피해를 구제받도록 했다. 예를 들어, 지난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이나 2015년 디젤차량 배기가스 조작사건처럼 개인 피해자 50명 이상이 나서 배상 판결을 이끌어내면 나머지 모든 피해자가 구제받을 수 있다. 집단소송제는 이미 2005년부터 주가 조작이나 허위 공시 등 증권 관련 불법행위(증권관련 집단소송법)에 부분적으로 적용돼왔으나, 이번에 추진되는 전면적 집단소송제는 업종 제한이 없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역시 이전부터 대리점 본사 등의 ‘갑질’을 막는 수단으로 하도급법이나 대리점법 등에 제한적으로 적용됐다. 법무부 안은 이를 모든 기업으로 확대하고 최대 5배까지 배상금을 물릴 수 있도록 했다. 법무부는 소송 이전이라도 업체 쪽에 자료 제출과 증거조사를 할 수 있는 ‘소송 전 증거조사 제도’(디스커버리 제도)도 법안에 담았다. 기업을 상대로 피해증거 수집에 어려움을 겪는 소비자를 돕기 위한 방안이다. 미국이나 영국, 일본 등 주요국에선 이미 자리를 잡은 제도들이다. 국회 입법조사처가 지난해 내놓은 ‘공정거래 분야의 집단소송제 도입방안’ 보고서는 “미국 연방법원에 2009년 이후 10년간 연평균 420건의 집단소송이 제기되는 등 집단적 피해구제에 적극 활용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영국의 경우, 공권력 남용 피해까지 상한액 없는 손해배상을 규정하고 있다. 이동우 변호사(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실행위원)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상당한 피해를 보고도 마땅히 대응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개인 피해자를 구제하는 방안으로 평가할 만하다”며 “징벌적 배상책임을 5배로 제한하는 등 기업에 책임을 더 확대하지 않은 점은 아쉽다”고 말했다.
이들 제도는 국내 정치권에서도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필요성을 인정해왔던 것들이다. 기업의 잘못으로 피해를 본 소비자를 보호한다는 취지인 까닭이다. 실제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2012년 공정거래위원회는 제도 도입을 위한 연구 용역에 착수했고, 같은 해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경제민주화 방안의 하나로 집단소송제 등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기도 했다. 당시 경제민주화 공약의 틀을 짠 게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다. 20대 국회에선 김종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법무부와 협의해 ‘증권관련 집단소송법’을 일반 제품이나 담합, 개인정보 침해 등으로 범위를 확대(단일집단소송법)하는 개정안을 냈지만, 제대로 된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한 채 폐기됐다. 이어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 공약이었던 두 제도 도입을 100대 국정과제의 하나로 추진해왔다. 법무부는 지난해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이 당정 회의를 통해 “전면적 집단소송과 소송 전 증거조사 제도 등을 도입하겠다”고 밝힌 뒤, 1년여 만에 법안을 공개했다.
■ “정상 경영활동 어렵다”…불법행위 억제가 취지
재계는 매우 강하게 반발한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거액의 배상을 목적으로 한 소송 남발 우려를 꼽는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지난 23일 법무부가 두 제도에 대한 입법예고 방침을 밝힌 직후 성명을 내어 “기업들은 현재도 형사처벌, 행정제재, 민사소송 등에 시달리고 있다”며 “제도가 도입되면 기업들은 정상적인 경영활동이 어렵고, 무엇보다 소송 대응 여력이 없는 중소, 중견 기업들의 피해가 막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도가 아직 도입되지 않은 상황에서 소송 남발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는 기우에 가깝다는 의견이 나온다. 박상인 서울대 교수(행정대학원)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경우 악의적인 고의성이 입증돼야 하기 때문에 소송 자체가 쉽지 않다”며 “제도의 취지는 기업들이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악의적인 행위를 스스로 억제하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창민 한양대 교수(경영학)도 “미국에서는 소송이 많이 걸리지만 다 재판으로 가지 않고 상호 합의를 통해 해결되기도 한다”며 “결국 피해를 본 소비자의 권리가 높아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계는 소송이 시작될 경우 재판 결과와는 무관하게 기업의 평판이 떨어져 주가가 폭락하는 등의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도 반대 논리로 든다. 이경상 대한상공회의소 경제조사본부장은 “소송을 제기하는 순간 해당 기업은 주가가 폭락하고 거래처가 끊기는 등의 부작용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도 “판결 결과와 무관하게 기업의 대외적인 평판이나 신인도가 저하되는 등 경쟁력에 부작용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무리한 소송으로 인한 주가 폭락의 사례가 드물뿐더러 자본시장의 자율적 규율 기능도 고려해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 이창민 교수는 “자본시장은 악의적인 소송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소송이 들어온다고 무조건 주가가 폭락하지는 않는다”며 “이러한 제도는 오히려 기업들이 이사회의 독립성을 강화하거나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등 장기적으로는 기업 가치를 향상시키는 모멘텀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홍석재 송채경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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