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텍사스 동부지법이 지난 21일(현지 시간) “삼성전자가 ㈜케이아이피(KIP)의 특허 기술을 ‘고의적’으로 탈취했다”며 2억 달러(한화 약 2400억원)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문제가 된 기술은 ‘벌크 핀펫(FinFET)’이라고 불리는 3차원 트랜지스터 기술이다. 이종호 교수(서울대)가 지난 2001년 발명했으며, 특허권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 자회사 케이아이피가 가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미국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에 나선다. 여기에는 “삼성이 개발한 자체 기술”이라는 기존 입장과 함께, 케이아이피의 특허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판단도 깔려있다. 그 근거로 “케이아이피의 특허는 일본 특허청에서 특허로 받아주지 않았고 미국 특허청도 지난해 10월 특허 최종무효 결정을 내려 현재 특허심판원에 계류 중”이란 사실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을 따져보면 삼성전자가 지나치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설명하려 한다는 인상을 준다.
이 교수는 기술 발명 뒤 각각 한국·미국·일본에 특허를 출원했으나, 일본은 특허를 등록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에서는 모두 특허가 받아들여졌다. 나아가 한국 특허청은 삼성전자의 ‘특허 무효 심사’ 신청에 대해 지난해 8월 “특허가 유효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애플이 지난해 수백억 원의 사용료를 케이피아이 쪽에 지급한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미국에서도 사정은 삼성 쪽 주장과 달리 복잡하다. 삼성전자는 미국 특허청 특허심판원에도 ‘특허 무효 심판’을 두 번이나 신청했지만, 모두 기각됐다. 이에 미국 텍사스 동부지법 배심원들은 1심 최종 판결에 두 해가량 앞선 지난 2018년 6월 삼성전자의 ‘고의적 기술 탈취’를 인정해 4억 달러(한화 약 4800억원)의 손해배상액을 평결했다. 삼성전자가 짚은 미국 특허심사국의 ‘특허 무효’ 결정은 그 뒤에 나왔다. 배심원 평결로 불리해진 삼성전자가 그해 10월 미국 특허심판원 산하 조직인 특허심사국에 재심사를 신청한 데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이 결정은 삼성 설명대로 “미국 특허청의 최종무효 결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케이아이피가 지난해 11월 특허심판원에 항고해 현재 심판이 다시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목할 대목은 손해배상을 다루는 미국 텍사스 동부지법이 미국 특허심사국의 ‘특허 무효’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판결문에는 1심 재판부가 케이아이피의 특허가 유효하며 삼성의 행위에는 고의성이 농후하다는 판단과 그 근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삼성전자는 그동안 이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왔다. 한 예로 삼성전자는 지난 2018년 경북대(이종호 교수가 서울대로 옮기기 전 재직한 대학) 쪽에 특허 소유권을 주장하도록 유도하거나 산업통상자원부에 케이아이피의 ‘산업 기술 유출’ 혐의를 조사해달라고도 요청했다. “벌크 핀펫은 삼성전자 고유의 기술”이라는 주장이 사실에 부합했다면 하지 않아도 되는 무리수가 아니었을까.
송채경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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