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5G 표준 기술을 둘러싼 경쟁은 단지 정보통신기술 산업 내에서 화웨이와 다른 기업들이 벌이는 경쟁이 아니라, 미국과 중국 두 나라 사이에 사활을 건 ‘전쟁’ 양상을 띠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마쓰시타 VHS vs. 소니 베타’, ‘블루레이 vs. HD-DVD’, ‘윈도우 인터넷 익스플로러 vs. 모자이크 브라우저’.
한 산업 분야에서 맞붙은 표준간 경쟁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사례들이다. 이 경쟁은 ‘전부 아니면 무’(all-or-nothing)의 결과로 끝나고 패배한 기업은 막대한 투자를 해서 개발한 신기술이 쓰레기통으로 가야 하는 참혹한 결과를 맞기 마련이다. 이런 이유로 전쟁에 빗대 ‘표준 전쟁’(standards war)이라고 불린다. 전쟁은 보통 국가 대 국가의 대결을 일컫는 말이고, ‘표준 전쟁’이란 한 산업 내에서 기업의 생존이 달린 치열함을 강조하고자 사용한 비유일 뿐이었다. 그런데 최근 진짜 표준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5G 표준 기술을 둘러싼 경쟁은 단지 정보통신기술 산업 내에서 화웨이와 다른 기업들이 벌이는 경쟁이 아니라, 미국과 중국 두 나라 사이에 사활을 건 ‘전쟁’ 양상을 띠고 있다. 중국이 세계 표준 경쟁, 특히 정보통신기술 분야에서 처음으로 도전장을 낸 것은 2003년 ‘와피’(WAPI)라는 와이파이용 보안 프로토콜 표준을 통해서다. 그해 어느 날 중국 정부는 앞으로 중국에서 생산되고 사용되는 모든 와이파이 제품은 중국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와피를 의무적으로 장착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막대한 내수 시장을 무기로 와이파이 보안 표준을 장악하겠다는 의도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인텔 등 미국 회사의 반발을 가져왔고, 당시 국무장관이던 콜린 파월이 만일 이것을 예정대로 시행한다면 미국과 무역 분쟁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는 공식 서한을 보냈다. 중국은 무기 연기라는 수를 내면서 한발 물러섰다.
‘일대일로’도 중국 기술의 세계 표준화 전략
오늘날 중국은 16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 따라서 작금의 표준 전쟁은 ‘표준 세계대전’이라 칭할 수 있을 만큼 전선이 전 세계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마치 1, 2차 세계대전 때처럼 세계가 두 진영으로 갈려 다투는 형색이다. 미국은 유럽과 일본을 연합으로 끌어들이고 있고, 중국의 화웨이는 러시아에서 5G 네트워크 설치 계약을 맺었다. 시진핑과 푸틴은 계약식에 직접 참석해 결속을 보여줬다. 이제 세상의 관심은 이 전쟁이 어떻게 흘러가서 결론을 맺을까에 쏠려 있다. 여기에는 세 개의 관전 포인트가 있다.(안타깝게도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관전평만 내어도 되는 여유로운 관중이 아니고 중간에 낀 곤혹스러운 당사자이지만.)
첫째, 중국은 20년 가까이 표준 전쟁의 진지전을 준비해 왔다. 2003년 최초의 와피 도전에서 쓴맛을 본 중국은 이후 국제 표준계를 조금씩 잠식해 왔다. 중국은 이제 주요 국제 표준화 기구 (ISO, ITU, IEC 등)에서 인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주류로 부상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국제통신 표준을 제정하는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사무총장에는 중국인 훌린 자오가 올해 초 4년 임기에 재선임됐다.
이런 예는 무수하다. 상층에서 중국의 주류화는 당연히 밑바탕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각종 표준화기구의 기술위원회는 중국 전문가들이 압도적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참호를 구축해 왔다. 심지어 우리 것이라 생각하는 고려인삼의 국제 표준화도 중국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놀라고 불쾌해 할 독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국제 표준화 기구 장악은 단지 인해 전술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미 여러 분야에서 기술력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5G 분야의 경우, 표준 특허(Standard Essential Patent)의 3분의 1 이상이 화웨이를 비롯한 중국 기업에 속한다. 와피, 중국의 3G 표준인 TD-SCDMA 등의 사례에서 내수 시장 의존 전략의 한계를 절감하고 지적 재산권, 특히 표준 특허 확보 전략으로 전환한 것이다. 표준의 관점에서 보자면 중국의 ‘일대일로’도 중국 기술의 세계 표준화 전략이다. 실제로 일대일로의 공식 문서에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문구들이 다수 존재한다.
둘째, 이 전쟁의 전선은 지리적으로나 산업적으로 전방위로 확대될 것이다. 우리에게 의미 있는 전선은 특히 두 곳이다. 지리적으로는 아세안이고, 산업적으로는 4차산업혁명 융복합 산업이다. 스마트 시티, 자율자동차, 스마트 팩토리, 에너지 관리, 헬스케어 등 5G가 가능하게 만든 융복합 산업에서 이미 표준 특허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중국 다음의 새로운 시장과 산업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는 아세안 지역은 이러한 융복합 산업 경쟁의 전장이 될 것이다.
셋째, 이번 표준 세계대전은 2차 세계대전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데이터를 둘러싼 쟁투, 즉 데이터 현지화(data localization)를 둘러싼 논쟁이다. 여기서도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국경을 넘어서는 자유로운 데이터 유통을 지지하는 축과 중국으로 대표되는 데이터 보호주의 축, 두 진영이 첨예한 대립 전선을 만들어 가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차량 공유서비스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을 단지 기존 산업과 신산업의 갈등으로만 보는 것은 근시안적이다. 이는 세계 데이터 전쟁에서 한국 기업들이 데이터를 축적하고 플랫폼 운영 경험을 쌓아 국제 경쟁에 참여할 것인가 아니면 이 데이터 전선에서 관중으로만 남을 것이냐는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세 개의 관전 포인트는 여러 다양한 전선에서 우리가 어떤 입장과 작전을 가지고 임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화웨이 사태를 맞아 당장 어느 줄에 서야 하느냐는 관점을 넘어서서, 거시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목표를 세우고, 전술과 전략을 세워야 하는 이유이다.
이희진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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