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40년차 최고참으로 금속노조 현대차 지부를 이끌고 있는 하부영 지부장은 현대차 노조 30년 역사의 산증인으로 통한다. 울산/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하부영은 현대자동차 노조 30년 역사의 산증인이다. 또 노동계에서는 현대차 최고의 전략·정책 전문가로도 불린다.
하부영은 18살이던 1977년 9월 공고 실습생으로 현대차에 입사했다. 한국 최초의 자동차 고유모델인 포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차체 용접 일을 맡았다가, 1983년 자동차 공정기술을 개선하기 위해 만든 생산기술본부에 차출되면서 사무직으로 변신했다.
1987년 6·10 민주항쟁의 열기는 현대차 역시 피해가지 않았다. 일부 노동자들이 회사의 사주를 받고 어용노조 설립을 추진하자, 하부영은 앞장서서 이를 막아냈다. 노조준비위원회는 농성과 파업 끝에 7월25일 회사와 노조설립 합의서를 체결했다.
하부영은 노조 임시집행부 조직부장으로 노조 설립 준비에 참여했다. “노조 창립멤버들이 우리 집에 모여서 어용노조 해산과 민주노조 준비작업을 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1988년 <한겨레>가 창간됐을 땐 울산지역 모집책을 맡아 구독자 확장에 발벗고 나섰다. “손자병법을 읽다가 ‘우군이 많아야 승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민주언론이 있어야 민주노조도 성공할 수 있다.”
하부영이 노동운동에 매진하고자 과장 승진을 스스로 거부한 것은 노동계에서 유명한 일화다. 1997년 외환위기가 한국경제를 강타했다. 현대차도 이듬해 수천명을 한꺼번에 정리해고하면서 큰 충격에 빠졌다. 당시 하부영 대리는 회사의 성과급 미지급 결정에 항의하는 노조집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회사는 그가 더 이상 노조활동을 못하게 하려고, 과장으로 전격 승진시켰다. 현대차에서 과장급 이상은 노조원이 될 수 없다. 그는 주저없이 과장 승진을 거부하고 노동운동의 길을 선택했다.
하부영은 2대, 6대 노조 사무국장과 8대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현대차 노조는 2006년 산별조직으로 전환해, 금속노조 현대차 지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부영은 이를 계기로 2008년까지 3년간 민주노총 울산본부장을 맡았다. 이랜드가 홈에버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용역직으로 전환하려는 것에 맞서 총파업 투쟁을 주도하다 구속돼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이런 경험 속에서 현대차 안에만 갇혀있던 노동운동의 시야를 넓혔다. “현대차 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힘든 상황에서 고통받고 신음하는 노동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또 노동운동이 대기업 노동자의 배를 불리는데만 매달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하부영은 서울로 올라가 민주노총, 금속노조 바로 세우기 운동을 시작했지만 실패했다. “바뀔 사람들이 아니더라.” 현장부터 바꿔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고 2010년 울산으로 돌아왔다. “현대차 노조가 바뀌어야 금속노조가 바뀌고, 금속노조가 바뀌어야 민주노총이 바뀌고, 민주노총이 바뀌어 세상이 바뀔 수 있다.” 그는 이후 대공장 노조의 변화와 혁신을 줄곧 주장했다. 지난해 9월 제7대 금속노조 현대차 지부장으로 뽑혔다. 입사 40년차 최고참 노동자로 정년을 불과 3년 남겨 놓고, 하부영은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울산/ 곽정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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