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이 경영일선에서 퇴진을 선언했다고 삼성전자가 13일 밝혔다. 사진은 올해 3월 삼성전자 주총에서 인사말을 하는 권 부회장. 연합뉴스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 뒤 삼성그룹의 ‘총수 대행’ 역할을 해온 권오현(65) 삼성전자 부회장이 13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이재용 부회장이 옥중에 있는 상황이라 그의 퇴진은 갑작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올해 말 후속 사장단 인사 등 큰 변화를 예고한다.
삼성전자는 13일 권 부회장이 반도체사업을 총괄하는 부품부문(DS) 사업책임자에서 자진 사퇴함과 동시에 삼성전자 이사회 이사, 의장직도 임기가 끝나는 내년 3월까지만 수행하고 연임하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겸직하고 있던 삼성디스플레이 대표이사도 사임할 예정이다.
권 부회장은 보도자료를 통해 “사퇴는 오래전부터 고민해왔다”며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아이티(IT) 산업의 속성을 생각해볼 때, 지금이 바로 후배 경영진이 나서 비상한 각오로 경영을 쇄신해 새 출발 할 때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그는 조만간 이재용 부회장을 포함한 이사진에게 사퇴 결심을 전하며 이해를 구하고 후임자도 추천할 예정이다.
권 부회장이 공식적으로 밝힌 사퇴 이유는 세대교체의 물꼬를 트겠다는 것이다. 삼성은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2014년 5월 이후 이렇다 할 사장단 인사가 이뤄지지 못해 정체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가 있었다. 지난해에는 국정농단 사태로 아예 사장단 인사 자체를 하지 못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권 부회장은 오래전부터 뛰어난 후배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다. 삼성에선 부회장이 대개 65살 이전에 물러났다. 과거에 윤종용 부회장이 64살, 이윤우 부회장이 65살에 물러난 바 있다. 권 부회장은 올해 65살이다. 권 부회장이 사퇴 시기를 고민하다 삼성전자가 최고 실적을 낸 13일을 발표일로 잡은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삼성 내부에선 그의 퇴진을 세대교체의 신호탄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의 이른바 ‘용퇴’가 다른 계열사 경영진의 퇴임을 끌어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번 기회에 이재용 부회장의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게 아니냐는 전망도 있다. 2심이 시작된 이 부회장이 ‘옥중 경영’을 하기 위해선 확실한 친정체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삼성은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뒤에도 이 회장 측근들이 핵심 보직의 상당수를 맡아왔다.
권 부회장은 이날 “지금 회사는 엄중한 상황에 처해 있다”며 “다행히 최고의 실적을 내고는 있지만 이는 과거에 이뤄진 결단과 투자의 결실일 뿐, 미래의 흐름을 읽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는 이재용 부회장이 회사로 하루빨리 복귀해야 한다는 주장을 에둘러 한 것으로 해석된다. 최근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삼성전자의 최근 호실적은 과거 리더십의 경영 판단에 따른 것이며, 리더십 공백이 장기화하면 경쟁력 약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돼왔는데, 이와 비슷한 맥락의 말이다.
관심은 사장단 인사가 단행될 때까지 리더십 공백을 어떻게 메울지, 그리고 권 부회장이 했던 삼성의 ‘얼굴’ 역할을 누가 맡을지에 쏠리고 있다. 사장단 인사는 이르면 다음달 중순이나 말께 단행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삼성 계열사 한 고위 임원은 “사장단 인사가 앞당겨질 것 같다. 평소 12월 초에 있었는데 앞당겨서 11월 말쯤 하지 않을까 예상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당분간 윤부근·신종균 대표이사 사장과 최고재무책임자(CFO)인 이상훈 사장 등이 리더십 공백을 최소화할 것으로 보인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이상훈 사장 등 옛 미래전략실 출신 임원들이 계열사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올해 삼성 사장단 인사를 얼마나 큰 폭으로 할지 주목된다”고 말했다.
권 부회장은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을 독보적 1위로 만든 인물로 꼽힌다.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은 이날 올 3분기에만 영업이익 10조원 등 최고의 실적을 올렸다고 발표했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권 부회장은 적절한 타이밍에 반도체 수급 조절과 과감한 투자를 통해 다른 업체들을 따돌리고, 현재의 삼성 반도체를 만든 인물”이라고 평했다. 반도체 ‘치킨게임의 장인’인 권 부회장은 올 상반기 반도체 실적을 인정받아 80억원 성과급을 홀로 받기도 했다.
이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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