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대표소송 제기 대상 기업을 추리고도 소 제기를 하지 않아 상당수 기업은 이미 소멸시효 완성으로 대상에서 빠져나간 것으로 확인됐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최근 위탁운용사에 ‘적극적 의결권 행사’ 등 주주 책임을 강조했는데, 정작 자신들은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대표소송은 주주가 회사를 대신해 회사에 손실을 끼친 경영진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것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인 취약한 지배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제도로 꼽힌다.
20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한 관계자는 “2021년 담합 등으로 과징금 처분을 받은 기업을 대표소송 대상으로 검토했다”며 “이후 소송 주체 논란으로 후속 조처가 진행되지 못해 17개 기업이 지난해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현대건설은 2012년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4대강 공사 사업을 분할 수주하려고 짬짜미를 해 22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이를 이유로 주주인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경영진을 상대로 대표소송을 제기할 수 있지만, 미적대다 지난해 소멸시효가 도래했다.
올해도 상당수 기업이 또다시 소멸시효 완성으로 대표소송 대상에서 빠져나갈 전망이다. 삼성물산과 대림이앤씨(옛 대림산업)가 대표적이다. 두 회사는 2013년 3조원대 엘엔지(LNG)저장탱크 공사 입찰에서 담합한 것으로 공정위 조사 결과 드러나 각각 732억원, 368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올해 대표소송을 제기하지 않으면 이들 두 회사 역시 소송 대상에서 빠진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대표소송을 제기해 승소하면, 회사가 물어낸 과징금 일부를 경영자가 책임지고, 그 돈은 회사로 귀속된다. 회사가 낸 과징금을 개인인 경영자가 책임지게 돼, 회사로선 이익이 된다.
최근 법원 판결은 대표소송 승소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지난 10일 서울고등법원은 소액주주 오아무개씨가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을 상대로 한 대표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동국제강 계열사였던 유니온스틸이 강판 가격을 놓고 담합을 한 게 공정위 조사로 드러나 319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는데, 오씨가 회사 쪽에 선관주의의무 위반을 이유로 장 회장 등 경영진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할 것을 요청했다가 거절되자 직접 소송을 냈다. 법원은 대표이사로서 회사 업무 전반에 대한 감시·감독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며, 장 회장은 45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대표소송을 위한 지침은 이미 마련돼 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1월 자료를 내어 “국민연금기금은 2018년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시 ‘수탁자책임 활동에 관한 지침’을 마련하고 관련 요건과 기준을 지침에 규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지침에는 ‘기금은 (중략) 기업이 이사 등으로 인해 손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사 등에 대한 책임추궁 등을 게을리하는 경우 기업에 대해 이사 등의 책임을 추궁할 소의 제기를 청구할 수 있다’(제21조)는 조항이 담겨 있다. 더욱이 2020년 상법 개정으로 해당 회사뿐만 아니라 자회사 경영진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대표소송에 나서지 않고 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홍보팀 관계자는 “소송 결정 주체 관련 규정이 확정되지 않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소송 제기 여부를 판단한 주체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수탁자책임위원회로 정하려고 개정을 추진했지만 경영계 반대로 불발하면서 소송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수탁자책임위는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소송 제기 여부를 판단하는 역할을 할 뿐, 모든 소송의 제기 여부를 판단하지는 않는다. 복지부 관계자는 “지금이라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판단해 소를 제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소송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강정민 경제개혁연대 연구위원은 “국민연금의 대표소송 제기는 이미 오래전에 결정된 사항인데, 소 제기 여부 결정권을 핑계로 허송세월하고 있다”며 “기금운용본부가 의지가 없는 게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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