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유화는 3천억원을 들여 울산 온산공단에 스티렌모노머(SM) 생산시설을 짓기로 한 결정을 무기한 미뤄놓은 상태다. 애초 올해 말까지로 잡아뒀던 보류 기간을 최근 한 차례 더 연기했다. 업황 부진 탓이다. 금호석유화학은 울산 석유화학단지 엔비(NB)라텍스 증설 작업의 완공 시점을 내년 12월에서 2024년 4월로 연기한다고 지난달 공시했다. 한화솔루션은 1600억원을 투자해 추진하던 여수 산업단지 내 질산유도품(DNT) 생산시설 증설을 지난 9월 철회했다.
에스케이(SK)하이닉스, 현대오일뱅크, 대한항공 등 다른 주요 기업에서도 애초 투자 계획을 철회하거나 보류·축소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미·중 갈등,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주요 나라들의 긴축 정책 같은 대외 악재로 투자 여건이 나빠질 것이란 전망을 반영하는 흐름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5일 내놓은 ‘500대 기업 2023년 국내 투자계획 조사’ 보고서에선 이런 분위기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국내 대기업 가운데 절반 가량이 자금시장 경색과 고환율 등 불안한 경제 여건으로 아직 내년도 투자 계획을 확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매출액 기준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내년도 투자계획을 물은 이번 조사에서 응답 기업(100개사)의 48.0%가 ‘계획 미정’(38.0%) 또는 ‘투자계획 없음’(10.0%)이라고 답했다고 전경련은 밝혔다. 투자계획을 수립한 기업(52.0%) 중에선 올해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응답이 67.3%로 가장 많았다. 올해 수준과 다르다는 응답 중에서는 투자 축소(19.2%)가 확대(13.5%)를 웃돌았다. 조사는 모노리서치에 의뢰해 11월17∼25일 이뤄졌다.
기업들은 내년도 투자를 올해보다 늘리기 어려운 이유로 금융시장 경색 및 자금조달 애로(28.6%)를 가장 많이 꼽았다. 원·달러 환율 상승(18.6%), 내수시장 위축(17.6%)이 뒤를 이었다. 올해보다 투자를 늘리겠다고 한 기업들은 미래 비전 확보(52.4%), 업계 내 경쟁심화(19.0%) 등을 이유로 들었다.
투자 활성화 시점에 대해서는 2023년 하반기 29.0%, 2024년 상반기 24.0%, 2024년 하반기 11.0% 등 내년 하반기 이후를 꼽은 비율이 64.0%에 달했다. 내년 투자를 저해하는 양대 위험요인(리스크)으로는 글로벌 경기 둔화(29.1%)와 환율 상승세 지속(21.3%)이 꼽혔다. 고물가(15.3%), 글로벌 긴축 및 금리상승 지속(15.3%), 과도한 민간부채 및 금융시장 부실화(9.7%) 등도 투자 위험 요인으로 지목됐다.
국내 투자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정부의 우선 정책으로는 기준금리 인상 속도 조절(24.6%), 자금조달 시장 활성화(22.0%), 기업 규제 완화(14.7%), 법인세 감세 및 세제지원 강화(13.7%) 등을 들었다.
추광호 전경련 경제본부장은 “내년에 경기침체가 본격화할 경우, 기업들은 수익성이 악화하고 투자자금 조달에 상당한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며 “기준금리 인상 속도를 조절하는 한편 적극적인 금융시장 안정 대책을 사전에 마련해 자금시장 경색을 미리 방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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