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왼쪽 두번째)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맨 왼쪽)이 지난 5월20일 경기도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생산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최근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올해 하반기는 물론 내년 투자 계획 조정을 검토하고 있다. 글로벌 인플레이션에 따른 수요 위축으로 반도체 값이 떨어지는데다 미국이 반도체 장비나 소프트웨어 등 대중국 수출 제한 품목을 늘리면서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어서다. 4분기 가격 붕괴 가능성까지 점쳐지고 있다.
5일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올해 4분기 반도체 가격 붕괴 위기가 올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트렌드포스는 지난 8월24일 올 3분기 낸드플래시 가격 하락폭을 전분기 대비 8∼13%에서 13∼18%로 조정한 데 이어 지난 1일엔 다시 30∼35%로 더 떨어질 것으로 수정했다. 가격 폭락은 업체 간 합종연횡의 촉발점이 될 수 있다고 트렌드포스는 내다봤다. 반도체 시장에서 ‘치킨게임’이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얘기다. 2007∼2008년 금융위기 당시 대만 반도체 업체들이 가격 인하에 나서면서 업체 간 출혈경쟁이 펼쳐졌다. 이에 따라 2006년 7달러이던 디(D)램 가격이 2009년 0.5달러까지 추락했고, 세계 2위 디램 생산업체였던 독일 키몬다는 2009년 파산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관련 수출 규제는 한국 기업들에 더욱 위기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한 반도체 업체 관계자는 “가격 하락에 더해 미국의 조처가 아직 확정되지 않아 ‘안갯속’인 상황”이라며 “투자나 고용을 조정할 필요성은 커졌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연구위원도 “반도체 공급 과잉, 글로벌 수요 감소 및 재고 증가에 따른 가격 하락, 중국의 빠른 기술 추격, 미·중 기술패권 경쟁 심화 등의 리스크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반도체산업의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반도체 전문가 상당수가 국내 반도체 산업이 심각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반도체 전문가 30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이날 공개한 ‘국내 반도체산업 전문가 조사’를 보면, ‘위기상황 초입’(56.7%), ‘위기 한복판’(20.0%) 등 10명 가운데 7명 이상이 위기라고 진단했다. 이들 가운데 절반 이상인 58.6%는 위기가 ‘내후년 이후에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다. 현재 상황이 최근 10년 새 가장 심각한 수준이라는 의견도 많았다. 전문가 43.4%가 2016년 중국의 메모리반도체 시장 진입, 2019년 미·중 무역 분쟁 당시와 비해 “더 심각하다”고 밝혔다. 범진욱 서강대 교수(전자공학)는 “과거 반도체산업의 출렁임이 주로 일시적 대외환경 악화와 반도체 사이클에 기인했다면, 이번 국면은 언제 끝날지 모를 강대국 간 공급망 경쟁과 중국의 기술 추격까지 더해진 양상”이라며 “업계의 위기감과 불안감이 어느 때보다 크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산업 발전을 위한 과제로 ‘칩(chip)4 대응 등 정부의 외교적 노력’(43.3%)을 가장 많이 꼽았고, ‘인력양성’(30.0%), ‘연구개발 지원 확대’(13.3%), ‘투자 세제·금융 확대’(10.0%) 등이 뒤를 이었다. 이장식 포스텍 교수(신소재공학)는 “반도체가 전략·안보 문제로 부각돼 정치·외교·안보적인 측면에서 해결해야 할 다양한 난제들이 생겼다”며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고 잘 팔릴 수 있기 위해서는 기업만의 노력이 아니라 정부의 역할이 이전보다 훨씬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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