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현대차·롯데·한화 등 주요 그룹들이 지난 24일 앞다퉈 중기 투자계획을 내놓으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새 정부 출범에 맞춰 주요 기업들이 투자·채용 계획을 내놓는 게 관행화돼 있긴 하지만, 코로나19 대유행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인플레이션 등 불확실성이 유례없이 커진 상황에서 같은 날 앞다투듯 대규모 투자계획을 내놓은 것은 이례적이란 평가다. 자연스레 총수 중심 재벌 경영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뒷말도 나온다.
25일 대규모 투자계획을 내놓은 각 그룹의 속사정을 보면, 새 정부 임기 동안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삼성(450조원)·롯데(37조원)·한화(37조원) 등이 윤석열 대통령 임기와 같은 5년짜리 투자계획을 내놓은 대목에 눈길이 가는 배경이다. 현대차(63조원)는 4년짜리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삼성은 사면을 통해 이재용 부회장에게 걸려있는 취업제한 족쇄를 풀어야 한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8월 가석방 이후 이 족쇄 때문에 경영활동을 제한받고 있다. 이 부회장은 또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외부회계감사법 위반 혐의로 재판도 받고 있다. 삼성은 급식업체 웰스토리가 총수 일가 이익을 위해 계열사들로부터 부당 지원을 받았다는 이유로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235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는데, 이에 항소를 제기해 재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투자계획을 내놓으며 삼성과 이 부회장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피력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삼성은 투자계획을 발표하며 “반도체 초강대국 달성을 주도”하고 “국민소득 증대로 이어져 국가 경제 발전을 이끌어가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겠다”고 강조했다. 또 바이오와 관련해 “바닷물이 질퍽이는 송도 매립지에서 시작”해 “글로벌 제약사 도약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경제개혁연대 강정민 연구위원은 “이 부회장의 사면 등을 기대하는 삼성이 새 정부 기조에 맞춰 투자계획을 밝힌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현대차는 법적 다툼은 없지만 경영권 승계 숙제를 안고 있다. 2020년 정몽구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추대되고 정의선 회장이 취임하며 실질적인 경영권 승계는 이뤄졌다. 하지만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현대모비스의 정의선 회장 지분이 0.32%에 그치는 등 지분 승계까진 마무리되지 않았다. 또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도 해소해야 한다. 2018년 현대모비스를 분할하는 등 지배구조 개편을 꾀했지만,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등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올 초 현대엔지니어링을 상장하려다 철회하기도 했다. 이후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지만 계속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다.
롯데는 신동빈 회장 사면이 가장 큰 과제다. 신 회장은 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농단과 관련해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2019년 10월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형을 대법원으로부터 확정받았다. 내년 10월에야 집행유예 기간이 끝난다. 이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 퇴임을 앞두고 경제계에서는 이재용 부회장과 함께 신 회장의 사면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창민 한양대 교수(경영학)는 “경제 불확실성이 엄청 커졌는데도 대규모 투자를 결정한 것은 합리적 판단이라기보다 총수의 사익을 위한 정치적 고려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윤승영 한국외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불확실성이 커진데다 기업마다 처한 상황과 투자 여건이 다른데 같은 날 투자계획을 발표하는 것이 여전히 우리 기업 지배구조가 후진적임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각 그룹은 이런 분석에 대해 투자계획 발표와 총수 일가의 숙원 과제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지난해와 달라진 투자 환경에 따른 발표”라고 거듭 강조했고, 다른 그룹도 같은 설명을 내놨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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